민족의 인종적 기원 / 앤서니 D 스미스 지음, 이재석 옮김 / 그린비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논쟁은 사회학·인류학계 등의 끈질긴 숙제였다. 크게 민족을 고대부터 존재해 온 원초적인 실재로 보는 이론과 근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이론으로 양분된다. ‘원초주의자’들은 언어, 종교, 민족성, 영역에 기초한 민족과 인종적 민족 공동체는 역사의 자연스러운 단위이고 인간 경험의 통합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민족성은 혈연관계의 확대이고 혈연관계는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집단적 목표를 추구하는 정상적인 매개물이라는 사회생물학적 견해다. 반면 ‘근대론자’ 중 대표적인 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 코넬대 교수는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 본다.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라는 의미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도 근대적인 현상으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봤다. 지난 세기 등장한 이 같은 주장은 큰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족을 어떻게 보는가는 가시적인 힘을 갖기 때문에 간단치 않다. 민족과 민족국가는 지금도 세계질서의 기본 단위로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유혈분쟁과 분리주의 운동의 기반으로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 사실 이 논쟁은 오랜 역사·문화 공동체를 이뤄 온 우리에게도 함의가 작지 않다. 현실적인 사례로, 진보 문학인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을 떼어내고 작가회의로 개명했다든지, 국내 역사학계나 사회학계에서 민족이란 틀을 벗어나는 움직임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됐다든지, 다문화 사회에서 여전히 단일민족이란 규정이 유효한지 등의 문제들이 관련돼 있다. 그래도 “민족이 헛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수긍이 덜 간다.

런던정치경제대 사회학과 교수로 ‘민족성과 민족주의 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민족과 민족주의 문제에 천착하며 탁월한 관련 저서들을 남긴 이 책의 저자는 ‘원초주의자’와 ‘근대론자’ 사이 입장에서 양자를 포섭하며 민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나간다. 그는 민족에게 축적된 역사적·집단적 경험이 중요하다고 보고 “공유한 조상의 신화, 역사, 문화와 특정한 영역과 연대의식을 가진 명명된 인간의 집합”을 ‘인종적 민족’(ethnie)이라고 정의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연결한다. 불어 ‘ethnie’는 영어 ‘ethnic’이나 ‘ethnical’에 해당하며, 부족(tribe)과 민족(nation)의 중간단계인 ‘종족’ 혹은 ‘인종’으로 번역할 수 있다. 저자는 수메르, 이집트, 그리스, 유대인, 켈트와 같은 고대 유럽과 근동의 인종적 민족 공동체의 ‘신화’ ‘기념물’ ‘상징’의 출현과 의미를 중요한 뼈대로 삼아 인종적 민족의 뿌리를 탐색한다. 이어 서구가 세속적 이익사회로 성격이 바뀌면서, 이 과정에서 영토나 문화 등 인종적 민족의 유산이 다시 불려 나오게 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는 전근대에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종적 민족의 범주와 지속성을, 다른 한편으로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미친 근대화의 충격을 규명하면서 민족의 형성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520쪽, 2만 9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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