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 칠한 뒤 끌칼로 파내
숨어있던 색점들 살아나며
벌집 같은 작은방들 지어져
평면의 한계 넘으려는 도전
내달 말까지 20여점 선봬
그림에도 ‘명품’이 있을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에르메스 매장 등이 있는 도산공원 일대는 명품거리다. 그런데 요즘 그 거리를 걷 다보면 이채로운 장면과 마주친다. 건물 1층에 쇼윈도가 있는데 전시된 것이 의상이나 핸드백 등이 아니라 그림이다. 그나마도 단색조 추상화다. 세계적인 프랑스의 아트북 출판사 ‘애슐린(ASSOULINE)’은 한국에서의 첫 전시로 김태호(70·사진) 화백의 작품을 선택했다. 독일의 타셴(TASCHEN), 영국의 파이돈(PHAIDON)과 함께 세계 3대 아트북 출판사로 꼽히는 애슐린은 샤넬, 루이뷔통, 크리스찬 디올, 까르띠에, 베르사체 등 명품 브랜드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실제로 애슐린에서 제작된 광고와 출판물은 명품으로 새롭게 거듭난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미술의 본고장 ‘파리’에서 탄생한 애슐린은 ‘한국적 추상’을 그려 ‘단색화(單色畵) 작가’로도 분류되는 김 화백의 어떤 점에 반했을까.
“서구의 모노크롬(monochrome)과 우리 단색화는 본질적으로 달라요. 서양의 모노크롬은 ‘단색조’라는 색깔만을 갖고 이야기하지만 동양에서는 색이 중요하지 않아요. 제작 과정에서 행위의 반복, 물성(物性)과 정신(精神)의 결합 등을 통해 탄생하는 작품을 단색화라고 합니다. 모노크롬과 차별화된 단색화의 특징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2012년 도산공원 인근에 문을 연 애슐린 라운지는 크게 지하 1층에 있는 북 갤러리와 카페 그리고 지상 1층과 지하 2층의 아트 갤러리 등으로 구성돼 있다. 김 화백의 작품은 아트 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쇼윈도에 전시된 작품은 지상 1층 갤러리의 작품 중 일부다. 대작 위주로 근작 2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1월 30일 시작됐고, 3월 말까지 계속된다.
전시장을 찾은 표미선 서울예술재단 이사장은 “박서보나 하종현 화백을 잇는 단색화 2세대로 국제적 조명을 받고 있는 김 화백의 작품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상징인 애슐린 라운지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고 감탄했다. 단색화라는 정의는 화가가 아닌 평론가들이 만든 말이지만 김 화백의 작업 과정은 단색화 개념에 꼭 들어맞는다.
작업에 앞서 김 화백은 먼저 캔버스에 격자 선을 긋는다. 선을 따라 물감을 붓으로 쳐서 쌓아간다. 수십 가지 색면의 층을 축적해서 두껍게 쌓은 후 그 표면을 끌칼로 깎아내면 그리드(grid·격자무늬) 사이 ‘작은 벌집과도 같은’ 수많은 사각의 작은 방이 지어진다. 그리고 그 벌집 입구와 내부로 물감층에 숨어 있던 색점들이 마치 리듬처럼 생생히 되살아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묘한 물감층의 리듬, 색깔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광채는 지켜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특히 그 시간과의 싸움과도 같은 제작 과정은 단색화의 키워드 중 하나인 ‘수행(修行)’을 연상시킨다.
왜 그의 작품 타이틀이 ‘내재율 시리즈’인지 작업 과정에 대해 들은 후 작품을 다시 보게 되면 이해가 간다. 김 화백은 고교 시절을 포함해 50년 가까이 추상회화에 매달려 왔다. 그러나 더 높은 경지까지 간다는 것이 화백의 욕심이다.
“추상화는 길을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실험하면서 찾아내는 것이죠. 알고 가면 재미도 없고요. 물감을 쌓은 후 면도칼로 깎아내고, 그라인더로 갈아보고, 구두칼로 포 떠내듯이 떠내보고… 그러다 보면 김치가 숙성돼 맛을 낼 때처럼 ‘됐다’ 하는 순간이 생기죠.”
미술평론가 오광수 씨는 김 화백의 작품에 대해 “촉감과 시각, 시간과 공간이 동일 차원에서 만나고 분산돼 끝도 없이 전개됨으로써 일반적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의 작품은 평면으로서의 한계에 봉착한 회화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도전”이라고 정의했다.
이경택 기자 kt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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