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규 논설위원

황제는 왕 중의 왕이다. 제후나 왕을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임금인 까닭이다. 그런데 황제로 번역되는 영어 엠퍼러(emperor)는 전쟁과 관련된 말이다.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나왔다. 정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이다. 이 중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가리켰는데, 나중에 황제를 지칭하는 말로 바뀌었다. 또, 영어로 시저라고도 하는 카이사르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고유명사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황제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바뀌었다. 브라운관이나 호치키스처럼. 독일어로는 카이저, 러시아어로는 차르이다. 결국, 엠퍼러와 카이저, 차르는 표기와 발음은 달라도 ‘황제’의 다른 말이다.

공교롭게 동양의 황제라는 존호도 ‘개선장군’과 닮았다. 어원은 중국의 진(秦)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6대 왕 영정은 그냥 ‘왕’으로 불리기를 싫어했다. 기원전 221년 주나라와 6국을 멸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를 이룬 위대한 왕이라는 자존심 때문이다. 그는 새 존호로 황제(皇帝)라는 말을 창안했다. 자신이 고대 전설 속의 성군 삼황오제의 덕을 모두 갖췄다며 이를 두 글자로 줄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진시황(秦始皇)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溥儀)는 1908년 즉위했으나 신해혁명으로 5년 만에 퇴위했다. 이어서 1915년 12월, 군인 정치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중화제국의 대황제 홍헌제(洪憲帝)라고 칭했다. 하지만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받아들인 일본의 5개항 21개조에 걸친 굴욕적인 요구서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의 매국 행위에 분노한 지방군과 일반 주민들의 반대운동이 성난 파도처럼 몰아쳤던 것이다. 국익도 저버리고 민심마저 무시한 대가를 그는 ‘3개월 황제’로 치러야 했다.

지금 한반도 주변국들에 ‘황제’들이 포진하고 있다. 바다 건너에는 덴노(天皇)가 일본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황위를 지키고 있고, 대륙 중국에는 개헌을 통해 1인 장기집권 기반을 다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좌정했다. 머잖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까지 연임하게 되면 또 한 사람의 ‘황제’ 차르가 등장한다. 장기 집권 강대국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인 우리가 ‘새우’ 신세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국민이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황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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