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이라는 약자로 불렸던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 1950년대 당시 정신질환 치료법인 뇌 절제술로 장기 기억을 잃지만 그에 대한 연구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학습에 관한 대부분이 밝혀졌다.  자료 사진
H.M.이라는 약자로 불렸던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 1950년대 당시 정신질환 치료법인 뇌 절제술로 장기 기억을 잃지만 그에 대한 연구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학습에 관한 대부분이 밝혀졌다. 자료 사진

- 환자 H.M. / 루크 디트리치 지음, 김한영 옮김 / 동녘 사이언스

심한 간질병 앓았던 몰래슨
뇌 ‘측두엽 절제 수술’ 받아
수술 뒤 기억 저장기능 상실

해당집도의였던 스코빌 박사
실험·치료·연구 수백건 진행
인간의 기억 생성 방식 발견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비밀요원처럼 한동안 H.M.이라는 약자로 불렸던 헨리 구스타프 몰래슨(1926∼2008). 그는 뇌과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지만 그 존재는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다. 1953년 심한 간질병을 앓던 스물일곱의 공장 노동자 몰래슨은 측두엽 절제수술을 받았다. 뇌 절제술은 당시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법으로 여겨졌고 때론 효과도 있었다.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뇌의 일부를 잘라 이를 근본적으로 치료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온전히 치료 목적만은 아니었고,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와 실험이기도 했다. 그의 집도의는 이 분야 최고 명성의 윌리엄 비처 스코빌 박사였다. 스코빌 박사는 몰래슨의 뇌에서 좌 우반구를 연결하는 부위의 해마 대부분을 제거했다. 경과는 좋았고 발작도 없어졌지만 예상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지능, 감각, 운동 기능 등은 모두 정상이었지만 H.M.은 더 이상 새 기억을 만들 수 없었다. 방금 나눈 대화, 조금 전 만난 사람, 새로 겪은 일들은 그의 기억에 저장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 무엇도 30초 이상 기억할 수 없게 된 그는 여든둘 사망할 때까지 ‘순간’만을 살았다.

수술은 그의 운명을 어두운 비극에 빠뜨렸지만 그의 비극은 과학자들에겐 비밀을 향한 문이었다. 그를 상대로 수백 건의 연구가 이뤄졌고 이를 통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억’과 ‘학습’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밝혀졌다.

이 책 ‘환자 H.M.’은 H.M.을 중심에 두고 뇌과학의 역사를 추적한다. 하지만 뇌과학의 역사를 단순 기술한 과학사가 아니다. H.M.의 일대기를 펼쳐놓은 논픽션도 아니다. 책에는 많은 과학자, 의학자가 등장하는데 그중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스코빌 박사, 몰래슨의 집도의인 동시에 저자의 외할아버지이다. 하지만 책은 손자가 쓸 법한 할아버지 위인전도 아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재료이지만 저자는 온갖 자료를 뒤지고, 사람들을 만나서 확보한 객관적 자료를 한 축에,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연구에 대한 윤리적이고 냉정한 질문을 한 축에 두고 뇌과학의 역사에 등장한 주·조연들, 이들이 벌인 연구, 치료, 실험의 역사를 흥미롭게 축조해 나간다.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보는 시선에서 저자의 입장이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스코빌 박사는 뛰어난 의사였고 연구자였지만, 단순히 치료를 위해서 절제술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비인간적인 생체 실험은 아니지만 그에게 절제술은 새로운 지식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지적인 열정의 결과였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뇌 절제술을 숱하게 집도했지만 수술법은 이전과 조금씩 달랐다. 사람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고 뇌를 자기 눈앞에 보고,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썼던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했다. 스코빌 박사뿐 아니라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 의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여러 열망과 욕망 안에 있었다. 저자는 이집트 시대의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으로 거슬러 가 나치의 생체 실험 등을 살피며 큰 목적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역사의 굽이굽이에 등장했던 결과형 ‘논리’를 거부한다. 몰래슨을 평생 관찰·연구한 것으로 유명한 수전 코킨 박사에 대해서도 몰래슨과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독점한 인물로 그렸다. 뇌과학계에서도 모든 인간 사회가 그러하듯 ‘귀한 것’을 독점하려는 싸움이 치열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준비에만 10년, 집필에만 6년이 걸린 책은 올리버 색스와 스티븐 킹이 만난 것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매우 적절한 설명이다. H.M.과 스코빌 박사 등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경우 개인사, 가정사, 생각, 구체적인 발언 등으로 인해 입체적인 모습을 갖고 이들이 뛰어들어 만들어 내는 일들은 스릴러 소설만큼 긴박하다. 저자는 말한다. “기억이 우릴 만들어도, 우리가 기억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최근에야 밝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 이해에 어떻게 도달했는지가 바로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는 영웅과 악당들, 비극과 로맨스, 폭력과 친절함이 있다. 이 책은 과학 이야기이자 인간과 모든 것의 본성을 말하는 이야기다.” 564쪽, 2만68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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