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3일 연세대 언더우드관 앞에서 4월 말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국론통일과 정부의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3일 연세대 언더우드관 앞에서 4월 말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국론통일과 정부의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반기문 前 유엔 사무총장

한반도 상황 극적인 반전 고무적
文대통령 꾸준한 관계개선 성과

비핵화과정·제재완화·체제보장
한번에 이뤄질거란 기대 버리고
단계별 매트릭스 정교하게 짜야

北 70년 최대위기…더는 못버텨
냉철한 머리로 서두르지 말아야

韓美훈련 축소·주한미군 철수 등
이슈도 아닌데 먼저 말해선 안돼
南北정상회담 前 국론통일 필요


1956년 소련군이 헝가리 국민의 자유를 위한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당시 충주 교현국민학교 6학년이던 반기문은 학생대표로 헝가리 의거를 지지하는 편지를 낭독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 중인 헝가리 국민을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이 도와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편지는 다그 함마르셸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졌다. 그로부터 꼭 50년이 지난 2006년 10월 13일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고 유엔 총회 수락연설을 통해 이 사연을 소개했다. 세계의 외교 대통령을 향한 반 전 총장의 도전은 이미 이때 시작됐는지 모른다.

외교학을 전공하고 외무고시 차석 합격과 신입 외교관 연수 수석 수료로 기초를 닦은 그는 주미 공사, 외교정책실장,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외교통상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거치며 내공을 쌓았다. 천부적인 성실함과 겸손, 소통 능력이 더해진 아시아적 리더십으로 10년간 유엔을 이끌며 지구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한 그의 꿈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난 13일 연세대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실에서 만난 반 전 총장은 남북·미북 정상회담을 포함한 한반도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 축적된 경험과 경륜이 묻어나는 고언과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유엔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벌써 14개월여가 지났다. 최근 국내 언론의 보도 내용을 보면 사무총장 재직 시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유엔 사무총장 때 설정하고 추진했던 주요한 목표들, 그러니까 기후변화협정이라든지 지속 가능한 발전, 여성 지위 향상, 청소년 권리 향상, 젊은층의 세계시민정신 함양 등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추상적인 일 같지만 이런 일을 통해 전 세계가 보다 조화롭게 번영할 수 있다. 다른 나라 정부나 국제기구의 요청으로 몇 가지 직책을 맡았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윤리위원장직이 처음이었다. 유엔 사무총장 재직 시 이미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과 오랜 기간 친밀히 협조 관계를 해왔다. 스포츠는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평화와 화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제안해 유엔총회에서 ‘Sports for peace and development(평화와 발전을 위한 스포츠)’ 선언이 결의되고 4월 6일을 국제 스포츠의 날로 정했다. 그 인연으로 IOC 윤리위원장을 맡았는데 평창동계올림픽과 관련해 바흐 위원장과 만나 북한 팀 참여 문제 등에 대해 논의를 했고 그런 내용을 문재인 대통령이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연락해주었다. 그 결과 북한 팀 참여가 급물살을 탔고 평창올림픽은 남북 간 화해 도모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최근에는 글로벌녹색성장위원회(GGGI: Global Green Growth Institute) 의장을 맡았다. GGGI는 한국 정부가 주도해 만든 28개 국가로 구성된 국제기구다. 본부를 서울에 유치했고 제가 유엔 사무총장 하면서 국제기구로 승격하는 데 적극적 역할을 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만든 세계 원로그룹(The Elders) 위원으로도 위촉돼 활동 중이다. 국내에서는 연세대 글로벌사회공헌원, 반기문 센터 포 서스테이너블 디벨롭먼트(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반기문 센터) 등을 맡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국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세계시민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기 나라만 들여다보면 국제사회의 분쟁과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세계가 함께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세계 지도자들이 글로벌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고 지난해 두 차례 문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같은 건의를 했다. 각종 특강과 대학 강의도 열심히 하고 있다. 앞으로 하버드에서 봄·가을 학기에 각각 1주일에서 한 달 정도 강의를 하든지 각종 세미나를 하게 된다.

―2016년 미국 외교·안보 잡지 ‘포린 폴리시’는 파리협정 발효 공로와 관련 세계의 사상가 100인 중 한 사람(정책결정자 부문)으로 선정했다. 기후변화 문제의 상위 콘셉트인 지속 가능한 성장의 철학적 배경은.

“21세기는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을 포함, 모든 분야에서 눈부실 만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지구촌의 모든 시민이 발전의 혜택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아직도 약 10억 명에 달하는 사람이 하루에 약 2000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극빈층이다. 14억 명은 전기가 없는 곳에서 살고 식수를 제대로 못 먹는 사람도 12억 명이 된다. 식량 생산량은 지구촌 모든 시민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수준이지만 경제제도와 분배, 운송 등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출산과정에서 사망한다. 1년간 600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5세가 되기 전에 죽는다. 그래서 유엔은 2000년 새천년이 왔을 때 2030년까지 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하에 8개 목표를 설정했다. 그런데 2015년이 됐지만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고 2016년부터 다시 15년간 지속 가능한 발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웹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각계각층 시민에게 어떤 세상을 원하느냐는 질문을 보냈고 800만 명이 답을 했다. 그걸 취합해 카테고리별로 과제를 나눴고 세계 각국과 교섭을 시작해 마침내 17개의 과제를 정했다. 첫 번째가 빈곤 극복이고 건강, 교육, 남녀평등, 에너지 등의 이슈가 포함됐다. 13번째가 기후변화인데 17개 중 기후를 제외한 16개는 정치적·경제적·과학적 합의를 이뤘고, 기후변화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면 지구 자체가 지속될 수 없으니까 구속력 있는 조약으로 만든 게 파리협정이다. 기후협정은 23년간 추진돼왔고 제가 10년간 열정을 다해 결실을 본 것이다.”

―어지럼증을 느낄 정도로 지금 남북 관계와 미·북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 최근에 북한과 미국이 모두 정상회담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데 성사될 것으로 보나.

“불과 지난해까지 한반도 전쟁을 걱정했던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된 데 대해 대단히 고무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측하기 어려운 외교적·정치적 수사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물론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가 걱정했다. 그런 와중에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작은 대화 물꼬가 트인 거다. 대화가 급진전하게 된 것은 역시 문 대통령이 국내외의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관계 개선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물밑 접촉을 계속해왔고, 특히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왔을 때 기회를 잘 포착했다. 방북 초청도 과감하게 받아들였고 미국과의 협조도 긴밀하게 잘한 것 같다. 특히 전격적으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아낸 것은 훌륭한 결단이었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미·북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고 본다. 한국과 미국, 북한의 정상이 모두 정상회담을 공언했다.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이미 두 차례 경험이 있고 장소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하는 만큼 문 대통령으로서도 세 번째 내리 북한에 가는 부담을 덜었다. 미·북 정상회담 역시 불확실한 요소가 없지 않지만 65% 이상은 된다고 본다.”

―남북정상회담은 미·북 정상회담의 전초전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 과정에서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하나.

“미·북 정상회담 개최는 금세기 최대의 외교적 사건이 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은 비록 세 번째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밑그림을 잘 그리면 미·북 회담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향후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틀을 잘 구상해야 한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외교·안보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냉철한 머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시작할 과정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입구가 될 것이다. 북한이 더 이상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결국 핵 동결과 사찰,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비핵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이다. 그 경우 미·북 수교를 포함, 북한의 체제보장이 이뤄지고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민의 기대가 워낙 크고 프로세스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다 보니 이 모든 프로세스와 목표가 한꺼번에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순서와 절차가 필요하다. 비핵화 과정과 제재 완화 및 체제 보장의 단계를 세분하고 순서를 잡은 뒤 단계별로 목표와 수단과 절차를 배치하는 등 매트릭스를 정교하게 짜야 한다. 외교에서는 빨리 흥분하거나 화내는 사람이 지게 돼 있다. 북한은 오로지 핵 문제만을 20년간 일관되게 추진해 왔지만 우리 정부는 5년마다 정권이 교체됐다. 북한은 우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3일 연세대 아펜젤러관 2층에 위치한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실에서 유엔 사무총장 재임 당시 못지않게 다양한 국내외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반 전 총장이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로 활동할 당시의 모습으로 ‘2023년 세계잼버리대회 전북 새만금 유치’ 지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3일 연세대 아펜젤러관 2층에 위치한 글로벌사회공헌원 명예원장실에서 유엔 사무총장 재임 당시 못지않게 다양한 국내외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반 전 총장이 중학교 시절 보이스카우트로 활동할 당시의 모습으로 ‘2023년 세계잼버리대회 전북 새만금 유치’ 지원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밝힌 다음 날 많은 언론이 ‘5월 핵담판’이라는 표현을 구사했다. 미·북 정상회담의 성과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나.

“정상회담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실무회담을 통해 충분히 조율한 뒤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타결을 보는 것과 정상회담에서 틀을 마련해 실무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번의 경우 세 정상이 정상회담부터 진행하기로 한 것 아닌가. 장단점이 있지만 몇십 년간 워낙 관계가 경색돼 있어서 정상회담을 통해 우선 큰 정치적 틀을 마련하는 것은 좋은 접근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정상회담에서 모든 것을 다 풀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신중한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큰 틀을 정하고 협상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다만 기본적으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것이다. 과정상에 동결 단계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 1994년을 포함, 여러 차례 합의가 이뤄졌지만 북한에 의해 파기됐다. 이런 경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정상회담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정상들은 더 많은 식견을 가지고 디테일한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있을 때도 미·북 수교 등의 기대감이 있었지만 ‘Through & broad approach(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법)’를 강조하며 매트릭스를 짰다. 그래도 파기됐다. 지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원칙)를 이야기한다. 증명 가능한 것을 넘어서 불가역적이지 않으면 북한이 미국과 군축회담을 하자고 주장하는 데 말려들어 갈 수도 있다. 여기에 혼선이 있어선 안 된다. 너무 디테일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완전한 폐기를 해야 한다.”

―총장께서도 북핵 협상에 참가했다가 북한이 합의를 파기한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나.

“1991년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됐을 때 저는 교섭단체 대표 중 한 사람이었다. 1992년 2월 공동선언이 국회에서 비준된 이후 남북한핵통제공동위원회가 구성됐는데 제가 부위원장으로 협상을 벌였다. 처음 교섭을 시작할 때 북한은 다 동의했다. 그러다 불시사찰(혹은 임의 사찰: 내가 원하는 임의의 시간에 북한에 통보하고, 북한도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지 어디든지 사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서 협상이 깨졌다. 그리고 북한이 문을 닫아버렸다.”

―북한은 9·19 공동성명(2005년 6자 회담을 통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복귀한다고 약속한 성명)이나 미·북 간 2·29 합의(2012년 북한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는 대신 미국은 24만t 규모의 식량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합의) 역시 파기하는 등 합의와 폐기를 되풀이해 왔는데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보나.

“1991년에도 미국 전술핵무기를 철수시키고 비핵화 회담을 하자고 해서 협상을 진행하는데 협상이 의외로 잘 진행됐고 그 결과 한반도비핵화선언이 채택된 거다. 그런데 결국 이듬해 남북한핵통제공동위원회에서 북한이 불시사찰을 거부하면서 합의가 깨졌다. 1994년 제네바 합의로 미국과 북한이 수교 직전까지 분위기를 끌고 갔지만 결국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탄두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로 치달았다. 결국 북한은 그간 비핵화 합의 이후에도 꾸준히 핵을 개발해온 거다. 이런 역사적 경험에 주목해서 가슴은 뜨거워지더라도 머리는 냉철해져야 한다. 지금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까지 모두 흥분해 있고 트럼프 미 대통령도 정치적 성과에 대한 기대 때문에 흥분해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 참모들 사이에서는 우려가 나오고 외신들도 냉정을 찾아가는 분위기다. 여기서 한국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한국에서 틀을 잘 잡아서 미·북 정상회담이 잘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이 각자 가면 문제가 생긴다. 한·미 공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단계에서 긴밀하게 협의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잘못되면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찬물을 끼얹으려는 게 아니라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그런 역사적 경험을 보면 북한이 궁극적으로 비핵화를 수용할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맞바꿀 의지가 있다고 보나.

“북한 측 의도를 미리부터 폄훼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왜 이 시점에서 북한이 이런 전향적인 입장을 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은 헌법에 핵강대국을 명문화했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비핵화를 하겠다고 한다. 선대 유훈이라고 하지만 그 유훈에도 불구하고 핵무장 조항을 헌법에 넣은 게 김정은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정은의 의도를 냉철하게 분석해봐야 한다. 현재 김정은은 정치적으로 체제 장악에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제·사회적으로는 북한을 나라다운 나라로 운영해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는 아주 복합적이고 조직적이다. 특히 2017년 12월 채택된 안보리 결의 2397호는 이전의 9개 결의보다 훨씬 강력하게 북한을 옥죄고 있다. 여기에 중국도 협조하기 시작했다. 석탄, 섬유, 농수산물 등 주요 수출품의 수출이 대부분 봉쇄됐고 유류는 400만 배럴, 정유제품은 50만 배럴로 수입이 규제됐다. 무역의 90%가량이 줄어든 것이다. 최근 북한에 장마당이 급속히 확산됐는데 거기서 팔 물건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 해상봉쇄까지 거론되고 있다. 김정은이 버티려고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낙타에 물건을 싣는 데 어느 정도까지는 버티지만 임계점에 도달하면 지푸라기 하나만 더 올려도 낙타 등이 부러진다. 지금 북한이 그 단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서 배워야 한다. 정부에 역사적 퍼스펙티브를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 북한 정권 70년에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붕괴되는 1980년대 말이다. 김일성은 세계사적 대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맞불을 놓았다.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남북한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허물고, 남북한 주민들이 자유왕래를 하고 고위급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고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이에 따라 남북 총리급 회담 등이 진행됐다. 국제사회에 분단 상황인 ‘한반도도 잘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 거다. 두 번째가 김정은이 당면한 현재의 위기다. 김정은이 나이가 고작 34세인데,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 평균 수명을 봤을 때 최소 40년 이상 버텨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선 절대 못 버틴다. 결국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제 판단이 틀리길 바란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데, 보수진영에선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의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 5·24조치 등 대북 제재를 서둘러 완화한다든지 과속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북한의 적극적인 자세를 유도하기 위해 제재를 풀고 싶지만 지금은 풀고 싶어도 풀 수 없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지만 만약 우리가 일방적으로 제재를 완화하면 결과적으로 미·북 정상회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미국이 북한 핵 문제에 완벽하고 철저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방향으로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절대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보이면 안 된다.”

―비핵화의 이상적인 결과는 북한이 핵을 개발하기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축소나 폐지, 주한미군의 축소나 철수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계속 거론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꾸 주한미군이나 한·미동맹이 어떻게 될 건지 얘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지금 정식 어젠다도 아니다. 북한이 주장할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 스스로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협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왜 상대편에게 양보해선 안 될 카드를 스스로 내놓으려고 하나. 그래서 문 대통령은 향후 무엇보다도 국론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 주한미군은 주둔지는 한국이지만 이미 국제·정치·외교적 함의는 한반도를 벗어난 사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이 통일 후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하지 않나. 호주나 뉴질랜드는 우리처럼 북한과 대치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다. 냉전이 해체됐지만 유럽에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유지되고 있다. 주한미군이나 한·미 동맹을 단견을 가지고 다루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정부가 독자 개헌안을 21일에 내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셨을 때 우리 정부 형태를 포함, 개헌 문제에 대해서도 구상이 있었을 것 같은데.

“개헌 필요성은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1987년에 개헌을 했으니 벌써 31년이 지났다. 그때와 비교하면 정치적으로 상황이 엄청나게 변했다.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제가 구체적 방향을 밝힐 입장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출마 의사를 밝혔을 당시 내각제 주장들이 있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대통령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각제 하는 나라들은 안보위협이라든지 이런 게 없는 나라가 많다. 내각제 하고 있는 나라들은 실제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나라는 1~2년이 지나도 내각 구성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독일도 총선 이후 내각 구성에 몇 달이 걸렸다.”

―두 달 정도 지나면 문재인 정부 출범 1년을 맞는데 적폐청산이 계속되고 있다.

“아주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다. 특히 국론이 분열돼 있는 사안이어서 조심스럽다. 다만 외국을 나가보면 평가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한국은 여러모로 우수하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지에 대해 외국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외국 사람들이 원인을 물어보면 부정부패 척결이나 정의 추구 등과 같은 원칙적인 답변을 하지만 답변이 다소 궁색한 것도 사실이다.”

―남북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 등 비핵화를 위한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미 동맹 균열이 발생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다.

“한·미 간의 관계가 늘 한 가지로만 가선 안 되고 갈 필요도 없다.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도 있다. 양국의 정부가 바뀌면 이념 성향에 따라 진폭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진폭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동맹 입장에서 보면 헷갈리고 불쾌할 수도 있다. 우리 스스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게 중요한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전 정부가 했던 것을 전부 부정하고 다시 시작하면 결국 자기도 존중받지 못하게 되고 우리 모두가 외부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미국은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한·미 동맹에 관해서는 입장 차가 크지 않다. 지미 카터 대통령 때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고 결국 추진하지 못했다. 최근 미국의 핵잠수함이 부산에 잠시 기항해 물자도 싣고 기름도 넣겠다고 했는데 북한을 자극할 염려가 있다고 해서 기항 자체를 거부했다는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제가 외교안보수석을 하면서 군 관련 경험도 있어 국방부나 계룡대 등에 강연을 가면 이렇게 이야기한다. ‘군인은 정치적인 판단을 하지 말아라. 군인은 군인으로서 행동해라. 전방에서 보초 서는 군인이 적을 발견하면 총을 쏘면 되는데 내가 총을 쏘면 한반도에 전쟁이 나는가 생각하면서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군대를 이끌 수 없다.’ 우리 정부가 미국 측에 부산 대신 진해로 가라고 했더니 미국의 핵 잠수함이 말도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바뀐 대표적 사례로 미국에 혼선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전작권 문제 역시 한반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전작권 전환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나.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세상 어떤 나라가 전작권을 외국군대에 맡겨둔 것을 좋아하겠나. 그러나 이건 현실적 여건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을 한 거다. 우리의 전시 대응 능력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군대가 주한미군으로부터 받는 여러 가지 지원에 의존하는 바람에 스스로 준비를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3년 내에 전작권을 우리가 갖겠다는 것은 신중해야 할 문제다. 더구나 한번 하겠다고 하면 충분한 준비를 거쳐 추진해야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 때 2012년까지 하자고 미국과 합의했다가 이명박 대통령 때 자기 임기 중에 끝나는 상황이 되니까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다시 교섭을 하자고 했고 박근혜 대통령 때 또 조건부 연기를 했다. 그래 놓고 문재인 대통령이 다시 임기 내 전환하겠다고 하면 미국으로서는 좀 짜증 나는 일일 수 있다. 제 생각은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해서 주한미군의 역할이 줄어들고 우리도 전략자산, 감시자산 등의 준비를 다 갖춰서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전작권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 박민 정치부장 minp@munhwa.com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