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영 워싱턴 특파원

북핵 협상에서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수차례 강조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지난 8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미·북 정상회담 제안을 전격 수용하면서 ‘일괄타결’ 방식으로 가닥을 잡는 모양새다. 청와대도 14일 알렉산더 대왕이 단칼에 잘라 풀어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언급하면서 북한 비핵화와 대북제재 완화, 평화협정 문제 등을 일시에 해결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단계적 접근이었던 2005년 9·19 공동성명이 2007년 2·13 합의와 10·3 합의 등 후속 합의로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검증 문제로 좌초됐던 전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괄타결’도 그렇게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지은 게 대표적인 일괄타결 사례다. 가깝게는 이명박 정부가 2008년 출범한 뒤 제안한 ‘그랜드 바겐’도 북핵을 폐기하면 북한에 안전보장·국제지원을 제공한다는 일괄타결 방식이었지만, 북한이 전혀 호응하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일괄타결 협상은 핵심 의제를 협상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주고받기’를 해야 한다는 특성상 대개 정상외교에서 자주 나타난다. 백악관 고위 관계자가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을 수용한 이유에 대해 “김 위원장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는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신감도 분명히 작용했다. 워싱턴포스트(WP)가 “대통령이 다시 직감(gut)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CNN방송이 “대통령이 다시 본능에 따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이유다.

일괄타결 방식에는 위험이 존재한다. 제임스 레보비치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WP 기고문에서 “트럼프에게 협상의 기술이 외교의 기술은 아니다”면서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미·북 정상회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정상회담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외교에는 학습곡선이 있고 △숙련된 외교관들이 미리 협상안을 마련해야 하며 △정상회담은 희귀품이어야 하고 △모든 대화가 다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게 바로 대부분의 워싱턴 전문가가 트럼프 대통령의 미·북 정상회담 수용에 대해 기대보다 우려를 더 많이 표명하는 이유다.

한·미는 정상회담 직전까지 갔던 2000년 미·북 협상 실패 과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현직 국무장관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지만, 평양 아리랑 공연을 관람하면서 북한 체제 선전 도구로 전락한 뒤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와야 했다. 결국 미·북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2002년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을 진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반면 1970년대 미·중 수교 사례에서는 그 치밀한 준비 과정을 배워야 한다. 미·중 수교의 주역인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실제 방문을 위해 성명 초안을 버리는 것은 재앙을 자초하는 짓”이라고 말했다. 한·미가 모처럼 만든 기회를 날리지 않으려면 준비가 세세하고 철저해야 한다. 진정 악마는 디테일에 있기 때문이다.

boyoung22@
신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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