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검사생활 대부분동안
조폭·마약사범들 상대하며
강력범 필체의 공통점 주목
변호사 개업후 본격 수집활동
곽종석 간찰 독특한필체 매혹
570명 독립운동가 글씨 모아
우연히 얻게 된 친일파 글씨
크고 호방…지나치게 멋부려
작고 소박 독립운동가와 대비
이육사 글씨 못산게 가장 후회
그분들의 인품 흔적 공유 위해
국가 기증하는 것이 최종 목표
검사 시절 조직폭력배와 마약사범을 상대하며 21년의 검사 생활 중 3분의 2 이상을 ‘강력부 검사’로 활동했던 구본진(53·사진) 변호사. 지금도 검찰 후배들 사이에선 ‘경찰 버스를 동원해 조직폭력배 두목을 잡았다’던 그의 일화가 전설처럼 따라다닌다. 예전의 명성을 알기에 강력부 검사의 인상을 기억하며 21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로 그를 찾아갔지만, 구 변호사의 얼굴에서는 박물관 큐레이터의 모습이 엿보였다. 변호사 사무실 또한 독립운동가 글씨로 빼곡해 박물관을 연상시켰고 박물관에 어울리듯 그는 인터뷰 내내 쉬지 않고 사무실 곳곳에 쌓인 글씨들을 해석해 줬다. 한때 조직폭력배는 물론 그들에게 뇌물을 받았던 경찰들에게까지 두려움의 대상이 됐던 그는 변호사 개업 후 ‘미술법·지적재산권’을 전문 영역으로 삼고 ‘독립운동가 글씨 수집가’와 ‘필적(筆跡) 전문가’로 활동하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먼저 검사 경력과는 거리가 있는 독립운동가 글씨 수집에 열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살인·마약·조직범죄 수사를 하면서부터입니다. 강력 범죄 중 살인자들의 글씨를 보면 기묘했어요.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씨체가 아니었거든요. 살인범들의 글씨를 보면 필압이 매우 강하고 행의 간격이 좁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글씨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후 1998년 미국 뉴욕으로 연수를 간 후 찾게 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구겐하임 미술관의 기증유물관을 보며 감탄했어요. 기증된 유물의 규모를 보며 저도 좋은 수집 테마를 정해 나중에 국가에 기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글씨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증 유물을 찾던 구 변호사가 570여 명의 독립운동가 글씨를 모아 국내 최고 수집가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0년 귀국 후 조상의 글씨를 수집하기 위해 찾은 화랑에서 뜻하지 않게 구한말 대표적 항일지사인 곽종석 선생의 간찰(簡札·한문편지)을 얻은 후부터다. 을사조약 체결 후 매국노의 처형을 상소했고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독립호소문을 보낸 곽 선생의 글씨를 본 구 변호사는 그의 필체에 매료됐고 독립운동가들의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인가 국가를 위해 기증할 것을 찾고 있던 상황에서 ‘독립운동가 글씨’란 테마를 찾게 된 거지요. 그다음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며 글씨를 수집했어요.”
구 변호사가 독립운동가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됐을 때 근무지는 대구였다. 국내 최대 규모의 고서점 거리가 있는 대구에서 주말마다 독립운동가 글씨를 수집했다고 한다. 공직에 있어 월급이 빠듯했던 그는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독립운동가 글씨를 수집할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독립운동가 글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덜할 때였습니다. 하루 10만 원을 들고 대구 봉산문화거리를 가면 독립운동가 글씨 2, 3점은 구할 수도 있었어요. 온종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글씨를 얻었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글씨 수집에 빠져드니 이후 근무지인 대검찰청에 가서도 지방으로 출장을 갈 때면 시간을 내서 고서점가를 찾게 됐습니다.”
그가 글씨 수집 활동에 날개를 달고 활동하게 된 것은 2015년 공직 활동을 그만둔 후부터다. 통상 공무원들이 퇴직 후 실의에 빠지는 것과 달리 구 변호사는 수집활동을 통해 활력을 얻었다. 그가 아끼는 한용운 선사의 원고와 김규식 선생의 글씨를 구한 것도 퇴직 후 최근의 일이다. “공직에 있을 땐 월급이 많지 않아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도 글씨 수집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검사란 신분 때문에 액수가 큰 것을 사는 데 부담도 컸고요. 하지만 변호사 개업 후에는 그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더 자유롭게 수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구 변호사는 독립운동가 글씨에 이어 친일파 글씨 수집에도 손을 대 260여 명의 친일파 글씨를 소장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글씨가 없을 때는 고서점 주인들이 ‘친일파 글씨는 있는데 사가시겠습니까’라고 묻더라고요. 처음에는 그 말을 농담 삼아 들었는데 어느 순간 소장가치도 있고 독립운동가 글씨와 비교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집의 폭을 조금 더 넓혔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체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보통 ‘독립운동가의 글씨는 호방하고 친일파의 글씨는 얍삽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의 글씨 수천 점을 본 제 입장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독립운동가의 글씨는 대체로 작고 멋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또 글자 간격은 좁은 대신 행 간격은 넓고 모양이 규칙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반대로 친일파들의 글씨는 크고 호방합니다. 지나치게 멋을 부린 것도 특징입니다. 글씨가 호방하다고 하면 좋게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통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 타협한 것이 될 수 있어요.”
글씨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구분한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구 변호사의 확신에 찬 분석은 계속됐다.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글씨 수천 점을 봤습니다. 글씨만 봐도 독립운동가인지 친일파인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독립운동가 글씨 소장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그가 꼽은 최고의 글씨는 누구일까. 질문을 받은 구 변호사는 한참을 고민한 후 “모든 분의 글씨가 다 명필이다”고 답변했다. 기자가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한 후에야 그는 “그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헤이그 특사로 독립운동을 한 이상설 선생입니다”라고 답했다. 구 변호사는 즉석에서 이상설의 글씨 몇 점을 펼쳐 보였다. “이상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유물을 다 버리라’고 유언하셔서 글씨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요. 제가 가진 그의 편지 2점도 몇 안 되는 물건입니다. 글씨를 보면 전반적으로 기백이 느껴지고 그의 수준이 느껴집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만한 명필이 없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대표적 친일파인 이완용도 명필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분석은 달랐다. “일반인들에게는 이완용이 명필가로 알려졌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반대입니다. 지나치게 꾸며 쓴 글씨로 간격이 좁고 글의 선이 어지럽습니다. 마음이 맑지 않다는 것이죠. 이완용이 명필가로 알려진 것은 그가 당시 서화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입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구 변호사가 보여준 독립운동가 글씨는 대부분 흘려 쓴 한자로 돼 있었다. 한자 실력은 물론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 없이는 수집 활동을 하기 어렵다. “한자를 읽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진품과 가짜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근현대사 연구가 병행돼야 합니다. 독립운동가 글씨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발행된 책만 수백 권을 읽으며 연구했습니다. 책을 읽고 연구할수록 당시의 시대가 보이고 글씨를 보는 눈도 높아졌습니다.”
구 변호사에 따르면 최근에는 독립운동가 글씨 유통이 크게 줄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일주일에 2, 3점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한 달에 한 점 구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이제 흔히 말하는 ‘밑바닥’ 물건은 거의 없습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집 벽장 속에서 독립운동가 물품이 무더기로 나왔지만 이제 그런 물건을 구하기 힘듭니다. 주거 형태도 아파트로 거의 다 바뀌어 집에 숨어 있던 소장품이 나오기는 더 힘들 거예요. 몇 년 전부터는 소장가들 사이에 돌고 도는 것들을 구합니다.”
18년 동안 글씨 수집에 열중했던 그에게 가장 큰 에피소드는 무엇일까. 최고의 소장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실패담을 들려줬다. “이육사 선생의 글씨를 사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2000년대 초반 대구에서 이육사 선생의 엽서 2점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점당 200만 원씩 400만 원에 사라는 겁니다. 그때 400만 원이면 한 달 월급보다 큰 액수인데 부담이 커 ‘1개만 200만 원에 팔아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들어주질 않더라고요. 그때 샀어야 했는데 나중에 또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포기했어요. 그 후에 이 선생의 글씨를 본 적이 없어 더욱 아쉽습니다.”
구 변호사에게 독립운동가 글씨 수집은 단순히 개인의 취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글씨를 국가에 기증하기 위한 준비로 요즘도 당시 시대를 연구한다. “역사상 많은 위인이 있지만 독립운동가들은 100년 전 목숨을 걸고 민족을 위해 희생하셨고 지금 한국의 건국을 위해 일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유품이 많지만 글씨는 이분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큰 유물입니다. 국민 모두가 제가 수집한 독립운동가 570여 명의 글씨 1200여 점을 보고 그분들의 인품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당시 시대를 반영해 해석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완성되는 데 10년 정도를 보고 있습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기증할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글씨 수집에서 보듯 구 변호사는 하나에 빠지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어 예술법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을 정도며 미술법·지적재산권 분야에선 국내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꼽힌다. 퇴직 후 그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구 변호사는 “테마를 정해 최고가 될 각오로 수집활동을 해보라”는 조언을 한다. “퇴직 후 친구들이 찾아오는데 다들 인생 2막에 열정이 없어 보입니다. 이들에게 꼭 권하는 것이 ‘수집’이에요. 뭐라도 하나에 빠지면 인생에 열정이 생깁니다.”
수집 활동을 권하면서도 구 변호사는 몇 가지 주의점을 잊지 않는다. “수집활동을 하며 파산하는 분을 여러 명 봤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분야에 손을 대면 경제적으로 궁핍해집니다. 꼭 당부하는 것이 특정 분야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독립운동가에 한정했지만, 주변으로부터 ‘수집 활동을 하며 분야를 조선시대 의병장 등으로 넓히라’는 유혹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렇게 했다면 경제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또 다른 주의점은 ‘연구’입니다. 연구하지 않고 수집 활동을 하게 되면 사기당하기 쉽습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문화 보존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단다. 인터뷰 말미가 되자 구 변호사도 이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며 50대 이상 동료들이 그와 같이 수집활동에 나서주길 희망했다. “이웃 일본을 보면 수집가들이 전국을 돌며 다양한 분야를 찾아다닙니다. 일본사람들과 달리 한국인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건을 다 버립니다. 다음 세대에서는 한국의 근·현대사 물품을 실제가 아니라 화면으로만 볼 수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50대 이상은 다양한 문화를 접해 봤고 은퇴 후 열정을 쏟을 분야도 찾아야 하니 근·현대사 문화가 더 사라지기 전에 수집활동에 참여했으면 합니다.”
정철순 기자 csjeong110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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