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편지’의 배경… 경춘선 경강역
1970~80년대 대학생들이
단합여행 가던 낭만의 열차
일제강점기때 지어진 驛舍
기차 끊긴후엔 관광지 변신
아름답기로 소문난 경강역
대학원생과 임업 연구원인
두 남녀주인공이 만나는곳
촬영후엔 사랑역으로 각인
아침고요수목원도 주요공간
청혼하고 결혼식올린곳이자
죽은 남자 주인공이 묻힌 곳
연인들 필수 데이트 코스로
스치는 바람에 제법 기분이 좋아지는 초봄, 교외로 떠나고 싶은 때다. 가평과 춘천은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 연인, 친구 혹은 가족과 더불어 부담 없이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중년들에게도 젊은 시절의 추억과 낭만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경춘선 열차. 서울과 춘천을 잇는 경춘선은 1939년 일제강점기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한 운반열차로 이용됐고, 1967년 월남전 파병군인들이 부산을 향해 몸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1970, 1980년대에는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단합대회를 갖는 대학생들을 실어 나르며 청춘과 사랑, 추억과 낭만의 열차로 자리 잡았다. 특히 봄이면 가평, 청평, 강촌 등은 단합대회에 나온 대학생들의 젊은 에너지로 넘쳐났다. 무궁화호 완행열차는 그 시절에 청춘을 지났던 사람들에게는 설렘과 낭만의 동의어다. 찬란하고 영롱했던 젊음의 사랑과 희망, 방황과 좌절이 혼재된 추억으로 뭉쳐진 낭만 열차다.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해 춘천역까지 87㎞의 철로가 놓여 있는 경춘선은 곡선이 유난히 많은 북한강을 끼고 있어 시속 50㎞밖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북한강이 만들어 놓은 수려한 경관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철로였다.
지금은 현대식 역들이 들어섰지만 복선 전철이 개통하기 전만 해도 경춘선은 개성 있는 역들로 가득했다. 대성리역, 강촌역, 춘천역 등이 가장 대표적인 역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그 밖에도 작고 아담한 간이역이 많다.
특히 아름답기로 소문난 경강역은 최진실, 박신양 주연의 영화 ‘편지’의 촬영지로 소개되면서 화제가 된 장소다. 서울 근교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대학원생 정인(최진실)은 기차역에서 임업연구원으로 일하는 환유(박신양)를 만나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결혼 후, 수목원 관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데 갑자기 환유가 악성뇌종양 판정을 받아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홀로 남게 된 정인은 삶의 의욕을 잃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죽은 남편에게서 매일 편지가 오게 되면서 정인은 환유의 편지를 기다리는 기쁨에 삶의 의욕을 느끼고, 또한 자신이 환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환유가 혼자 남게 될 정인을 위해 편지를 써놓은 것이었고 역장(驛長)이 전달해준 것이었다.
뇌종양으로 죽기 직전 홀로 남게 될 아내를 위해 편지를 쓴 남편의 진실한 사랑을 다룬 영화 ‘편지’는 1997년 개봉 당시 흥행성과 작품성 둘 다를 인정받았으며 조폭영화로 가득했던 한국영화의 흐름을 순수한 사랑의 멜로드라마로 복원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정인과 환유는 경강역에서 운명적인 상대를 만난다. 매주 월요일이면 누군가 플랫폼에 꽃을 놓아두는데 정인은 즐거운 한 주를 위해 그 작은 화분을 어김없이 집어 든다. 그러다가 그만 지갑을 떨어뜨리고 그 모습을 본 환유는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는 추격전 끝에 정인을 만나 인사를 나눈다. 경강역은 두 사람의 인연이 맺어지는 장소이자,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장소다.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시골 간이역은 영화 ‘편지’ 이후 사랑역으로 각인됐다. 경강역은 2003년 방영된 SBS TV 드라마 ‘천국의 계단’에도 나온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도전하고 아파하는 청춘남녀의 운명을 그린 ‘천국의 계단’에서 송주(권상우)는 정서(최지우)를 뒤쫓아 오지만 기차를 놓쳐 자동차를 타고 뒤따라 가게 된다. 이 장면이 바로 이 사랑역에서 촬영됐다.
영화 ‘편지’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은 모두 운명의 여인을 놓치기 싫어 자동차로 기차를 뒤쫓는 남성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경강역은 남녀 간의 운명적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인 듯 보인다.
한편, 경강역이란 이름의 유래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강원 춘천시 남산읍 서천1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예전 이름은 ‘서천역’이었다. 그러나 1955년 장항선의 충남 ‘서천역’과의 혼동을 우려해 현재의 경강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강역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대에 있는 역이라고 해서 두 지역의 앞글자를 빌려와 만든 명칭이다.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 역은 원형이 잘 보전돼 있어 영화촬영지 이전에 사료적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지만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으나 플랫폼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다. 관광지로 탈바꿈하면서 열차를 대신해 철로에는 레일바이크가 오가고 있다. 70여 년의 긴 세월을 뒤로하고 2010년 폐역이 된 경강역은 이제는 또 다른 낭만과 추억을 안겨주는 장소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영화가 개봉된 지 어느덧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 기차도 다니지 않는 경강역은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듯 애처로워 보인다. 청춘이 영원히 머물지 않듯 우리네 인생도, 경강역도 그렇게 변한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슴 절절하게 파고들 뿐이다. 역사(驛舍) 곳곳에는 영화 ‘편지’의 흔적만을 남기고 추억의 성지로 남았다.
경강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침고요수목원이 있다. 경기 가평군 상면 행현리에 위치한 아침고요수목원 역시 영화의 주된 촬영지다. 영화 속 환유는 임업연구원으로 수목원 관사에 살고 있어 많은 부분이 수목원에서 촬영됐다. 1996년 개원한 아침고요수목원은 축령산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국 전통의 미를 원예학적으로 잘 조화시킨 곳이다. 또한 22개의 특색 있는 정원은 곡선과 여백으로 채워진 길들이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더한다.
수목원에서의 데이트를 신청한 환유는 수목원을 거닐며 즐거운 데이트도 즐기고 청혼까지 한다. 그리고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야외결혼식을 진행한다. 싱그러움이 가득한 수목원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잔디밭과 화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산책로, 백두산 식물 300여 종을 포함한 5000여 종의 식물이 수목원을 메우고 있다. 조경이 잘된 덕분에 이곳에서는 ‘편지’를 시작으로 영화 ‘조선명탐정’ ‘중독’,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웃어라 동해야’, 그리고 예능 ‘무한도전’ 등 많은 작품이 촬영됐다.
죽음으로 젊은 생을 마감한 환유는 수목원에서 잠들고 정인은 한 그루의 나무 밑에서 환유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편지’의 흥행 이후 아침고요수목원은 연인들의 필수 데이트코스이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장소가 됐다. 수목원 입구에서 들어오면 준봉들이 에둘러 선 너른 평원 한쪽에 잣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정인이 환유와의 옛 추억을 더듬었던 곳이다. 지금은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환유나무’로 불리고 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황동규 ‘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만큼 영화감독들에게 사랑받는 시(詩)가 또 있을까. 이 시를 모티브 삼아서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만들어졌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정국 감독은 ‘즐거운 편지’에 대한 애정을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두 번씩이나 낭송하는 것으로 드러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사랑에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리움과 애틋함을 뒤로한 채,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는 영화 ‘편지’. 한없는 기다림으로 이별을 이기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시 ‘즐거운 편지’의 메시지를 오롯이 전달하고 있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다. 가방 하나 둘러메고 여행하기에 기차 여행만 한 것이 없다. 이젠 구불구불한 단선 철로 위의 무궁화호 열차 대신 반듯하게 펴진 복선 전철이 지나고 있다. 경춘선 일대의 철로는 폐선이 됐지만 그렇다고 추억까지 지울 수는 없다. 봄이 지나가기 전에 그곳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양경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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