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측에선 이젠 ‘봄이 온다’ 하고 북측에선 벌써 ‘가을이 왔다’고 한다. 김정은의 계산되고 연출된 ‘평화의 바람’ 앞에 온 나라가 ‘달에 홀린 피에로’처럼 휘청거린다. 청와대는 남북에 이어 미·북 정상회담까지 ‘기적같이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분계선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을 가늠해 우리가 무엇을 경계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선즉제인(先則制人)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남보다 먼저 일을 도모해야 남을 쉽게 누를 수 있다. 허를 찌른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방문에 이어 곧 이뤄질지도 모를 러시아 방문, ‘평화 공세’와 ‘광폭 행보’에 결코 열광만 해서는 안 된다.
지난 25년 동안 북한은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마법의 단어로 한국과 세계를 홀려 왔다.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김정은이 기만극을 펼친다면 북한은 지상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한편, 국내외적으로 악재에 시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 회담에서 빈손으로 걸어 나오게 되면 초강대국 대통령으로서 자격지심은 물론, 대북 선제공격이나 한국의 핵무장 허용 또는 전술핵 재반입 등 강경책밖에 남는 게 없을 것이다.
한국 정부와 국민에겐 단군 이래 최대의 도박일 수도 있다. 혹여 이번에도 북한의 위장전술에 넘어가고 시간 벌기에 끌려다닌다면 정부는 벼랑 끝에, 국민은 막다른 골목에 몰릴 것이다. 정부도 국민도 낭만을 버리고, 북핵 폐기 의지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해야 할 때다.
북한이 25년 넘게 공들여 만든 33기에 가까운 ‘만능의 보검’을 결코 버릴 리 없다. 그들의 헌법에까지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5월 미·북 정상회담의 최대 의제는,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이다. 일단, 남북과 미국도 모두 ‘비핵화’라는 총론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차이가 드러난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던진 ‘비핵화 카드’는 동결-신고-검증 등 각 단계마다 상응한 조치가 따라야 하는 전술로, 기존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북한의 ‘조선반도 비핵화’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미국과의 수교가 이뤄진 이후 일이다. 미국은 CVID 이후에 체제 안전을 보장한다는 선(先) 핵 폐기 방식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일괄 타결과 단계적 타결은 동전의 양면”이라며 이런 방식엔 반대한다. 정상 간 비핵화 선언을 함으로써 큰 뚜껑을 씌우고, 그다음부터 실무적 검증과 폐기로 가자는 것이다.
이처럼 비핵화 해법을 두고 남·북·미 간 괴리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문재인 정부는 더 이상 손에 든 카드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매파에 둘러싸인 미국 앞에 비둘기파에 갇힌 대한민국은 자칫 운전석은 물론 조수석마저 내주고, 갓길에 내려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비핵화 협상에서 중국은 혈맹(血盟) 북한 편이다. 따라서 비핵화에 있어 한국은 미국과 결을 같이 해야만 한다. 미·북 정상회담은 결국 ‘한·미’ 대 ‘북·중’의 대결 구도가 돼야 할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완전 폐기하고 미국에 핵시설을 전량 보관하는 방식의 협상을 해야 한다. 이제, 일괄타결이니 단계적 타결이니 하는 원론이 아니라, 무제한 검증과 사찰 같은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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