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제는 3학년이 된 1학년 때의 제자 인사 올립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저의 죄를 사죄하려고 합니다. 그때의 저는 8시에 자습실을 나와 학교의 어두운 계단을 밟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교실에서 분필 네 자루를 훔쳤습니다. 각각 빨간, 노란, 파란 그리고 하얀 분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선생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게 변명 몇 가지를 늘어놓으려 합니다. 작은 제 양심을 들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째, 선생님은 빨간 분필만큼이나 열정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시고 점심시간에 학생들을 부리지도 않은 채 홀로 책장과 무수한 책들을 먼지 사이에서 정리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새로 문을 연 도서관에서 직접 꽃을 꺾어 말리고 학생들에게 응원 문구를 적은 책갈피를 만들어 나눠 주셨죠. 한창 힘들던 제가 선생님께 받은 책갈피의 문구는 ‘힘을 내요, 절대 강자’였습니다. 짧은 문구 한마디지만 손수 손글씨를 배우시고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펜 끝에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직도 그 책갈피는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책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둘째, 선생님은 파란 분필에 담긴 바다만큼 마음이 깊으셨습니다. 저희에게 성적으로 무어라 꾸중하는 대신 학생의 꿈을 아무런 이유 없이 믿어 주셨고 저희 노력을 아무런 결과 없이 인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집으로 발송되는 성적표를 낚아채 제가 먼저 뜯어봤을 때 그 속에는 여태껏 알아차리지 못한 놀라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선생님께서 손수 쓰신 편지였습니다. 항상 집으로 발송되는 성적표에는 선생님께서 부모님을 위해 손수 쓰신 편지가 함께 있었죠. 학생 모두가 잘될 것이라는, 그러니 더 헤아려 주시고 많이 보듬어 주시라는 편지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셋째, 선생님은 노란 분필을 닮은 봄에 떠오르는 분이셨습니다.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봄에 학교를 바라보며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나눴던 대화는 제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제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셨고 제 삶에 대해 이해해주셨습니다.
넷째, 선생님은 흰색 분필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학생을 위하셨습니다. 저는 항상 미용실에 갈 일이 있으면 “머리가 묶일 정도는 꼭 남겨주세요” 말하고 머리를 자르곤 합니다.
지금은 선생님께 저에게 가르쳐 주길 원하셨던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잘 걸어 다니지만 일학년 때 제가 소심했을 적에는 제 얼굴에 드리운 머리카락은 저를 더욱 소심해 보이게 만들었고 그걸 보신 선생님은 제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머리 묶고 다녀볼래? 더 예쁠 거야!” 말씀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분필들을 닮은 선생님은 항상 수업 전에 커피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커피는 수업 내내 그대로 있었고, 선생님은 수업을 거의 마치고서야 커피를 들이켰습니다. 분필 가루가 잔뜩 들어간 커피를 마시는 선생님이 너무 안타까워 보였습니다. 저희를 위해 항상 조심스레 아침마다 빗자루로 분필 가루를 쓸어내리는 선생님이 가장 많이 분필 가루를 들이켜는 모습이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런 지금, 선생님이 가신 자리에 미처 다시 돌려놓지 못한 그때의 분필을 손으로 문질러 보곤 합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손때 묻은 답지처럼 저도 선생님의 기억에 오래 남는 제자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떳떳하신 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돼 다시 뵙기 위해 염치불구하고 사과문을 올립니다.
* 문화일보 후원,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주최 ‘감사편지 쓰기’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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