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형편 어려워서 대학 진학 포기
좋은 작품 쓰면 그만이라 생각

교육 못받은 위인들 보며 위안
그들 작품 읽으며 나홀로 공부

지금은 무수저 소년이 흙수저…
사회적 약자 성공 세상 됐으면


집안이 무척 빈한했다. 극빈 중의 극빈이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있다. 필자는 금수저는커녕 아무 수저도 갖지 못한 ‘무수저’로 태어났다. 배를 참 많이도 곯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한글을 깨치고 천자문까지 떼었다. 예닐곱 살 때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곧잘 얘기책을 읽어드리곤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줄곧 전교 1등만 했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괜히 ‘수재’니 ‘신동’이니 ‘천재’라고 부추겼다. 아니었다. 나는 수재나 신동이나 천재가 아니라, 그저 부모님 속 썩이지 않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순진한 아이일 뿐이었다. 이런저런 상을 참 많이 받았다. 선생님들께서 무척 아껴주셨다. 하지만 그 지독한 가난 때문에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형편에 중학교 진학이라니 그건 일종의 사치였다. 30리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점심은 쫄쫄 걸렀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운동장으로 나가 수도꼭지를 입에 물고 벌컥벌컥 맹물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면 물이 차서 배 속이 출렁거렸다.

제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독촉이랄까 질책을 당할 때는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때에도 3년 동안 개근했다. 그 험난한 우여곡절을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근근이 고학으로 학비를 마련했다. 물론 고등학교 과정도 3년 개근했다. 이로써 초·중·고 통산 12년 개근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다. 필자는 지금도 학업성적보다 이 기록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중고등학교 과정 6년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머나먼 길을 도보로 통학하면서 세운 기록이기에 더욱 자긍심을 갖는다.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꿀 수 없었다. 고3 때 이미 서울의 어느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있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현실적 과제가 더 다급했다. 그 절박한 생계문제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기 이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학교 시절부터 청운의 꿈이 있었다. 문학이었다. 장차 문학의 길로 나아가 좋은 작품을 쓰면 그만이지, 학력(學歷)이 무슨 대수랴 싶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에 매달려 살았다. 위인전도 많이 읽었다. 동서고금의 위인들은 대개 남들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한 주인공들이었다.

특히, 그런 위인 중에는 부자(富者)보다는 빈자(貧者)가, 고학력자보다는 저학력자가 훨씬 더 많았다. 아예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채 독학(獨學)으로 성공한 인물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랬다. 국내외 위인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학벌과 학식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정규교육을 못 받았을지라도 순전히 자력으로 세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위인들을 본받아 실력과 능력만 쌓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한몫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착각이었다.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몸 전체로 체험했다. 우리 사회야말로 능력 위주의 사회가 아닌, 학력 위주의 사회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고학력자들이 따뜻한 양지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차가운 음지에서 한껏 몸을 움츠려야 했다.

서러웠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그 어떤 악조건도 무릅쓰고 앞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끊임없이 문학 수업을 쌓았다. 사회로 뛰어든 이후 생존을 위해 그 무지막지한 중노동 속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세계 명작에 심취하다 보면 괴로운 세상잡사를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 습작도 할 만큼 했다. 원고지에 뭔가를 쓰고,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우고, 원고 뭉치를 통째로 아궁이에 처넣어 불태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70년대 중반, 20대 초반의 한창 팔팔한 나이로 문단에 나왔다. 기뻤다. 마침내 애초부터 가고자 하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문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우선, 호구지책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울음을 웃음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최소한 언젠가는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것을 믿으려 했다.

세월이 흘렀다. 왕년의 ‘무수저’ 소년이 그럭저럭 흙수저 하나쯤은 갖게 되었다. 지난 세월 워낙 약자로 살아왔던 터라 누군가에게 ‘갑질’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나 할까, 약자를 보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안간힘을 썼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오직 한 우물을 파며 떳떳하게 오늘 여기까지 와서 삶의 보람을 반추하게 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 사회에서도 학벌을 뛰어넘는 성공의 신호탄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언론에는 종종 ‘고졸 성공 신화’가 보도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고졸자 중에서 대통령이 두 분이나 나왔다. 최근에는 공무원·공공부문에서 학벌·학력·신체조건·출신지 등을 묻지 않는 ‘정보 가림 채용(블라인드 채용)’ 제도까지 도입했다. 아주 잘한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적 약자도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학벌 차별을 극복하고자 지금 이 시각에도 가슴 벅찬 도약을 설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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