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규 논설위원

근 40년 전의 일이다. 마을 회관은 이른 아침부터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나온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공무원 S 씨의 업무는, 접수 순서에 따라 한 분 한 분 시골 어른을 호명해 작업이 차근차근 잘 진행되도록 돕는 일. “김○○ 여사님!” 그런데 그의 호명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재차 크게 불렀을 때에야, 환갑쯤 돼 보이는 한 여성이 앞으로 떼밀려 나왔다. 모두 환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정작 그 ‘김 여사님’의 두 볼은 잘 익은 토마토였다. S 씨도 당황스러워했다. ‘대통령 영부인’에게 쓰는 호칭을 사용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여사’는 결코 서민용 호칭이 아니었다.

문제의 여사(女史)는, 중국 주(周)나라 때만 해도 황후의 의식 사무를 관장하면서 관련 기록과 문서를 담당하는 여성 관리였다. 그러다 한(漢)대 이후에는 후궁의 기록까지 담당했다. 나중에는 황제나 왕과 동침할 비빈들의 순서를 정하는 일까지 맡게 되면서 권한이 막강해졌다. 하지만 왕조시대와 함께 이 용어도 사멸하고 말았다. 이웃 일본에서는 결혼한 여성의 성(姓) 뒤에 붙이는 존칭어였다. 그것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말로 건너와 오늘에 이른다.

오는 27일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가 북한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에 대한 호칭으로 ‘여사’를 쓰기로 했다고 하자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리설주의 호칭을) 여사로 쓰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공식적인 호칭’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도 ‘리설주 여사’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 매체가 지난 2월 8일 건군절 열병식 보도 이후 리설주에게 ‘동지’ 아닌 ‘여사’ 호칭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면 북한에서 ‘녀사’는 어떤 의미인가. 첫째, ‘사회정치적 활동에 참가하는 여성 활동가’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사회정치적 활동이란 말 속엔 ‘진보적이며 혁명적’이란 뜻이 숨어 있다. 둘째, 결혼한 여자의 이름 뒤에 쓰여 그 여자를 일정하게 사회적으로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평범한 이 두 번째 의미가 리설주와 무관함은 물론이다.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우리말과도 거리가 멀다.

특히, 언론이 ‘여사’란 호칭을 아무에게나 사용하는 것은 ‘진짜 여사’들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는 비록 호칭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원칙과 금선(禁線)이 있다.
황성규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