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장

‘주인의 자세’ 굳건해야 도덕적 존재
생업·철학선 주체적 삶 강조하지만

잘못 송금한 주식 임의 처분하고
밝혀진 역사의 과오도 인정 안 해

과잉 주인 의식의 포로서 벗어나
자신을 세상의 손님으로 바라봐야


신입 사원이 기쁜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하면 주인 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일을 시키면 하고 그러지 않으면 멍하니 앉아 있지 말라는 말이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누가 신입을 따라다니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하는 일은 없다. 직무 연수를 거쳐 부서를 배치받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보란 듯이 척척 해야지, 멀뚱멀뚱 시계만 보고 있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직업의 세계에서만 주인 의식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철학에서도 주인 의식뿐만 아니라 ‘주체가 돼라’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된다. 우리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주체로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독일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사람은 그저 물건처럼 세상 어딘가에 놓여 있는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이루거나 만들고자 하는 생각을 인정받고자 한다. 그래야만 사람은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생각을 짜내서 자신이 무얼 만들고도 생산물을 가지지 못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나서 세상에 제 뜻을 펼칠 수 있는 주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노예와 주인의 자리는 고정되지 않고 인정(認定) 투쟁을 통해 역전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호 인정에 이르기 전에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떳떳이 밝히고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주인이 되고자 한다.

주희에 따르면 사람은 날씨·기분·환경 등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질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기질은 사람을 바쁘게 부산떨게 하다가 언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하니 떠나버리는 손님의 특성을 갖는 반면, 본성은 다른 곳에 눈길조차 보내지 않고 한곳에 집중하여 제 삶을 지키는 주인의 자세를 갖는다. 손님의 특성에 물들지 않고 주인의 자세를 굳건히 지키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을 이뤄야 사람이 도덕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주희는 부처님과 미륵처럼 초자연적 존재에게 기도해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바란다면 제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손님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다.

생업과 철학에서 주인 의식과 주체적 삶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신입 사원은 낯선 곳에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시간을 보내고, 사람은 떨어지는 낙엽에 슬퍼하고 피어나는 봄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이처럼 현실에는 주인 의식과 주체적 삶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삶이 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증권회사가 잘못 송금한 주식을 처분 금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매도해 수익을 꾀하는 사람도 있고, 사법부의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법과 양심에 따른 판사를 인격 살해하는 사람도 있고, 인터넷 공간에서 외국인과 지역 그리고 성차별을 무기로 남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의 과오로 밝혀졌는데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 시켜서 마지못해 처분하고 공격하고 고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주식을 임의로 처분하고 남을 공격하고 자신의 의사를 고집하는 일은 개인의 일탈과 자유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이제 사회적으로 성찰하고 그다음을 논의해 봐야 한다. 지금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런 일로 인한 더 심각한 사회적 고통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분·공격·고집의 사회 현상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발생해 공통점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도 않고 나아가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공통점이 있다. 잘못 송금된 주식을 처분하지 말라는 요구도,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가지게 된 조건도, 법과 양심에 따라 엄격하게 내린 평결도, 수없이 많은 연구와 탐구의 결실로 밝혀진 진실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고 따르며 그대로 살아간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이 현상이 헤겔과 주희가 원래 사유했던 맥락과 다르겠지만, 그들도 모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주체적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헤겔과 주희의 공과(功過)에 대한 논의는 계속 진행 중이라 여기서 다룰 필요야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상호 인정과 인정의 경쟁을 무시하고 오로지 나만 최고이고 최선이라는 사유를 성찰해 봐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대화와 경쟁 대신에 배제와 공격을 전가의 보도로 마구 휘두른다면 그런 주인 의식과 주체적 삶은 신에게만 가능하다. 즉, 주인 의식의 과잉이자 과잉의 주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고 나만의 해석이 있으면 충분하고, 사법에는 다른 평결은 있을 수 없고 나만의 평결이 있을 뿐이고, 현실에는 그 어떠한 규범도 존재할 필요가 없고 나만의 욕망이 실현되면 그만일 뿐이다. 사회는 총과 칼은 들지 않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이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전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런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면서 군복을 입고, 회원제가 아닌데도 비슷한 제복을 입으려고 한다. 자신이 국민과 시민 그리고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만족할 수 없고 전사나 투사로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일상을 전장으로 만드는 삶은 사람을 계속 긴장하게 하고 피곤하게 한다. 이로 인해 겪지 말아야 할 고통으로 힘겨워하고 신경증을 내며 서로 불편해한다. 일상을 전장에서 평화의 터전으로 돌리려면 과잉 주인 의식의 포로 상태를 떠나 자신을 이 세상의 손님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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