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순환출자 해소에만 집중
해외 투기자본 공격의 빌미 줘
외환위기 이후 방어장치 없애

최근 지배주주의 권한축소 등
여당 중심 상법개정까지 추진
“한국, 기형적 상황에 노출 돼”


“‘제2의 엘리엇 사태’는 3년 전부터 예고됐다. 투명성만 강조해 한 줄로 세우는 지배구조는 오히려 돈 냄새를 맡은 기업사냥꾼에게 공격의 빌미를 던져주고 있다. 국내 자본 시장이 투기 세력의 놀이터가 된 것은 공격자에게만 유리해진 구조 탓이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잇달아 해외 헤지펀드의 표적이 된 가운데 상장사들이 경영권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한 채 지배 구조 개선에만 내몰리면서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건전한 지배구조를 만들자는 취지지만 일정 지분을 확보한 투기세력이 경영 참여나 경영권 장악을 시도할 때 최대주주가 이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이에 기업들은 ‘방범 장치’ 없이 ‘대문’을 열어놓은 채 투기자본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재계에서는 지난 2015년 삼성을 공격했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최근 현대차를 노리자 지배구조 개선의 실효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순환 출자 해소는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한다는 순기능도 있지만, 거꾸로 적대적 인수·합병(M&A) 등 경영권을 위협받는 부작용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순환출자구조가 깨지면 외부세력이 기업을 건드리기 쉬워진다”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조가 적대적 M&A를 방지할 수 있는 장치 역할을 했던 셈인데 이를 다 뜯어놓으면 공격받기 쉬워진다”고 말했다. 이어 윤 교수는 “순환 출자의 순기능도 감안해야 하는데 최근에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투명성만 강조해 기술 탈취 의도를 가진 M&A, 시세차익만 노리는 경영권 공격 등에 기업이 노출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투기 세력 앞에서 재계는 무장 해제된 상태다. 재계에 따르면 외환 위기 이후 당국은 외국자본을 유치한다는 명목 아래 주요 경영권 방어수단을 없애버렸다. 1997년 대량주식 소유제한이 폐지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외국인의 국내 기업 주식 10% 이상 취득 시 이사회 동의 요건이 폐지됐다.

최근에는 기업을 옥죄는 상법 개정도 추진되고 있다. 여당이 주축이 된 상법 개정안은 집중 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 대표 소송제 도입 등이다. 집중 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시행되면 몇몇 헤지펀드가 뭉쳐 감사위원을 선임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외국 투기세력의 입김만 세질 수 있다. 일반 이사보다 권한이 많은 감사위원은 재무 등 회사 경영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도 들여다볼 수 있다.

반면 포이즌필, 차등 의결권 도입 등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적 틀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적대적 M&A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 제도는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선진국은 대부분 도입하고 있다. 구글을 비롯해 나이키, 포드, 발렌베리 등은 이를 통해 안정적인 경영권을 구축했다. 포이즌필도 미국·일본·프랑스·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널리 보급된 제도다. 이는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으면 기존 주주에게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주는 것이다. 미국은 기업사냥꾼의 적대적 M&A가 기승을 부리자 1982년 이 제도를 도입했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소버린 사태나 삼성물산 경영권 공격 등 유사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고도 대비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아 기업들은 ‘빗장’을 연 채 방어장치가 없는 기형적 상황에 노출돼 있다”며 “선진자본시장에는 없는 지배구조 규제로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쓰면서 연구개발, 투자 등 기회비용을 날리고 있다”고 말했다.

권도경·유현진 기자 kw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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