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에게 살해된 왕 /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과거 유럽의 왕조들은 대부분 강한 힘을 지닌 야수를 문장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 왕국은 사자를, 스웨덴 왕국은 황소를,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 왕국은 독수리를 상징으로 두는 식이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은 유독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과 푸른색을 문장으로 선택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왕에게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가져다준 ‘악마의 돼지’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프랑스의 중세사학자인 미셸 파스투로의 분석이다. 상징사라는 영역을 개척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근대 이후 역사책에서 자취를 감춘 왕의 죽음을 수면 위로 끌어내 여러 상징에 얽혀 있는 중세 유럽 역사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1131년 10월, 루이 6세의 맏아들인 필리프가 불결함과 탐식의 상징이던 돼지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뒀다.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루이 7세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혼과 실정을 거듭하자 왕조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고육지책으로 루이 7세와 그의 자문이던 생드니 수도원장 쉬제가 선택한 것은 성모 마리아의 도상에서 가져온 백합과 파란색이었다. 이를 왕국의 문장으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왕국의 수호자로 둔갑시켰고, 왕실과 기독교의 엄호에 힘입어 두 상징이 관습처럼 자리 잡기 시작했다. 320쪽, 2만5000원.

인지현 기자 loveofall@munhwa.com
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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