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배경 부산항
올해로 데뷔 50주년 맞은 歌王
‘꽃피는~’ 첫 소절에 가슴 뭉클
조용필 시대 연 매그넘 오퍼스
1970년대 냉전완화 격동 시기
재일동포들 부산항에 몰려들어
형제 단어 삽입한 가사 큰 호응
밴드시절 대마초 피워 ‘공백기’
4년후 ‘돌아와요…’실린 1집내
150만장 판매 ‘슈퍼스타’ 등극
해운대 옆에는 ‘꽃피는 동백섬’
유명한 시인묵객들 즐겨 찾아
해송·바다·꽃 어우러진 절경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전국 순회 콘서트를 앞두고 있는 가수 조용필. 그의 노래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 번도 쉬질 않고 부단히 우리를 보듬어 주었다. 실례로 우리는 노래방에 가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꼭 부르곤 한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첫 소절만 불러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명실상부한 국민가요임에는 이견을 달 수가 없다. 무명의 조용필을 일약 톱 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이후 가왕 조용필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노래인 것이다. 마치 항구가 없는 부산을 생각할 수 없고,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없는 조용필을 생각할 수 없듯 말이다.
이 노래는 원래 통영 출신의 고 김해일(본명 김성술)이 부른 ‘돌아와요 충무항에’(작곡 황선우)를 다시 부른 곡이라 한다. 1970년 이 노래를 발표한 김해일은 이듬해에 대연각 호텔 화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이후 가왕의 개작과 편곡을 거쳐 가왕의 매그넘 오퍼스(Magnum Opus·음악가나 작가의 대표작)가 돼버린다.
당시 이미자, 나훈아, 조미미, 황금심, 김희갑, 김세레나, 이성애, 박성희 등 많은 인기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가왕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정통 트로트를 따르지 않고 록 리듬을 결합시킨 장르적인, 그리고 가왕 특유의 창법이 주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는 더불어 당대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는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 정세가 급격히 변동되는 시기였다. 한·일협정 체결 이후 두절됐던 부관페리호가 다시 운행됐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으로 인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자 민단과 조총련을 아우르는 재일동포들이 부산항에 몰려온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 맞춰 노랫말도 ‘님 떠난’에서 ‘형제 떠난’으로, ‘보고픈 내 님아’를 ‘보고픈 내 형제여’로 바꾼 것이다. 이렇듯 개인적 애가(哀歌)인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동포애를 강조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꿔 엄청난 대중의 호응과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이었다.
마치 가왕의 성장처럼 1970년대 부산항도 역시 실로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다. 부산항은 1876년(고종 13) 2월 일본과 체결한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따라 인천항과 원산항 개항에 앞서 부산포라는 명칭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항으로 개항했다. 해방 이전에 대륙 침략 거점으로 이용됐던 부산항은 1950년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유엔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고, 전쟁 후에는 물자를 실어 나르는 연안선이 입·출항하는 항구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수출 주도와 경제 발전의 시대 과제에 맞춰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부산항은 제1·2단계 개발 사업으로 4개 전용 부두와 부산 국제 여객 부두 등이 축조됐다. 이어진 1985∼1991년 부산항 제3단계 개발 사업과 1991∼1997년 부산항 제4단계 개발 사업으로 부산항은 동북아시아 국제 물류 중심의 항만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렇듯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오늘의 부산항은 북항 일반부두를 제외한 부산항 대부분의 일반부두에서는 1990년대부터 컨테이너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대부분 컨테이너 화물이 취급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으로 내외무역은 물론 해외 여객수송의 관문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아시아의 허브항으로 나날이 도약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현재에도 2020년까지 부산 신항 개발 공사가 실시되고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 26세의 가왕은 벅찬 감격에 젖어 그 뜨거운 대중의 반응을 만끽했으며, 방송 출연 및 밤무대를 휩쓸었다. 그러나 이전 밴드시절 몇 대 피웠던 대마초는 1975년 휩쓴 대마초 파동 때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4년간의 공백기를 갖게 되고, 대마초 연예인 해금조치 이후 지구레코드와의 전속으로 1979년에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해 정규 1집 ‘창밖의 여자’(1980)를 발표한다. ‘단발머리’ ‘한오백년’ 등 가요사의 명곡이 실린 이 앨범에 다시 한 번 수록한 버전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대한민국 최초로 150만 장 이상 팔리는 판매실적을 기록하며 본격적인 슈퍼스타의 자리에 등극한다. 이즈음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져 수많은 일본 가수가 리메이크한다. 정식 싱글로 처음 발매한 가수는 엔카(演歌) 그룹 도노사마킹즈로, 1979년 ‘눈물의 부두’라는 곡으로 발표했다. 당시 가사는 한국어 가사와 거의 같았고, 이후 1983년 아쓰미 지로(渥美二郞)가 ‘부산항으로 돌아와요’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하면서 70여 만 장을 팔아치우며, 아쓰미 지로의 대표곡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또 일본 엔카의 여왕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와 대만 출신 명가수 등려군(鄧麗君)도 일본어 버전으로 이 노래를 취입했다. 일본서 활약한 김연자, 미녀가수 야시로 아키(八代亞紀), 모리 마사코(森田昌子), 흑인 엔카 가수 제로(Jero) 등 20여 명이 리메이크했다. 특히, 폴 모리아도 연주곡으로 편곡해 ‘플리즈 리턴 투 부산 포트(Please Return to Pusan Port)’라는 제목으로 음반에 실었다.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남해안에는 동백섬이란 이름을 가진 섬이 많다. 제주도, 거제 지심도, 여수 오동도, 광양 동백림과 더불어 현재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도 일반 명칭은 동백섬으로 섬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동백나무가 섬의 이름이 됐다. 군사보호지역인 탓에 해안의 모든 절경을 다 볼 수는 없지만, 황옥공주의 전설이 깃든 인어상이 있는 해운대 바닷가 쪽 암반과 절경만으로도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동백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고, 섬의 중앙에는 최치원의 동상과 기념비가 서 있는데 예로부터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유명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다. 고운(孤雲) 최치원의 자인 해운(海雲)에서 비롯된 지명인 해운대는 최치원이 낙향해 절로 들어가는 길에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주변이 무척 아름다워 동백섬에 해운대(海雲臺)라는 글을 음각으로 새겼다고 한다. 여기서 해운대의 이름이 유래됐다.
해송의 울창함과 바다 구름의 어우러짐 또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안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강렬한 붉은 빛을 발하는 동백꽃이 꽃방석을 이루는 이곳 ‘꽃피는 동백섬’엔 너무도 짧은 봄을 만끽하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었다. 지난 2005년 평양 단독공연에 이어 올 4월 초 남북 평화협력 기원 남측 예술단 ‘봄이 온다’ 공연의 일원으로 평양 무대에 섰던 가왕이 심장병을 앓다 세상을 떠난 부인을 생각하며 부인이 남긴 재산 24억여 원 모두를 심장병 어린이에게 기부한 선행이 밝혀져 또 한 번 귀감이 되고 있다. 필자는 이곳 ‘꽃피는 동백섬’의 붉은 동백 꽃송이에서 가왕의 삶을 배운다.
글·사진=최성철 음악평론가·페이퍼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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