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저는 할머니의 손녀 지수예요. 항상 할머니께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한글을 읽지 못하시는 것을 알기에 차마 첫 문장만 쓰고 다시는 편지를 써 내려 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번 기회를 빌려 하고팠던 말들을 써 보려고 해요 .
언젠가 할머니가 저에게 ‘6·25 때 굳센 표정으로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간 네 할아버지가 한 줌으로 돌아왔다’고 말씀하시며 그 상황이 정말 원망스러웠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아마도 할머니는 큰고모, 큰아빠, 작은고모, 작은 아빠, 아빠, 삼촌인 육 남매를 키우느라 할아버지의 죽음과 남편 없이 홀로 남은 삶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거나 밤새 흐느낄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오셨죠. 그리고 할머니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은 한 겹 더 입히고 한 입 더 먹이려고 하셨던 그 사랑을 저는 알아요.
엄마·아빠로서 준비가 덜 돼 있던 상태로 저와 제 여동생을 맞이한 엄마와 아빠는 끝내 제가 4세가 되던 무렵 이혼을 선택하셨고, 그 뒤로 제가 4학년이 될 때까지 할머니는 저희를 위해 살아오셨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너무 잘 보살펴주셨어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면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와 세수를 시켜주셨고 학교에 가는 토요일에 학교를 마치고 나오면 항상 양산을 들고 저희를 데리러 오셨었죠. 또 저희에게는 과일 덩어리를 주고 할머니는 과일 껍질에 붙은 과육을 드시기도 했고, 병원에 다녀오시기만 하면 저희 주려고 사탕을 한 주머니 가득 챙겨오시기도 했죠. 저는 할머니가 제 할머니라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조그맣던 꼬마의 작디작은 행복조차도 싫었는지 하늘은 엄마 없이 살아가던 제게서 아빠를 영영 뺏어갔고, 할아버지 없이 꼬마와 자식들을 활력 삼아 살아가던 할머니에게서 아들을 뺏어갔어요. 게다가 병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으신 아빠. 어떻게 하늘이 그렇게나 무심할 수가 있는지, 정말 하늘이 미웠어요. 게다가 아빠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삼촌까지 의문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됐고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고야 멈출 수 없는 할머니의 그 떨림을 저는 봤어요. 그제야 ‘아 할머니가 아무리 원더우먼 같았어도, 그 모습이 할머니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싶으면서 나에게 항상 커 보이기만 했던 할머니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어요. 학업과 진로 고민, 온갖 일에 치이면서 살다가 방학 때 할머니를 보면 그 자체가 얼마나 치유가 됐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거예요.
언젠가부터 할머니의 몸에 든 멍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고, 조금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할머니의 눈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고 어지럼을 느끼시더라고요. 그리고 최근에는 제가 내내 했던 이야기를 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까지 계속 물어보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좀 자세히 찾아보게 됐는데 ‘노인성 치매’의 증상과 겹치는 부분이 몇 있더라고요. 자식,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까지를 위해 희생하며 살아오신 할머니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약해지신 것인지, 어느새 이렇게 늙으신 건지 죄송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할머니 덕에 저는 세숫대야 속 물처럼 따뜻한 사람으로, 남을 위해 따가운 햇빛을 막아 줄 수 있는 양산 같은 사람으로, 과일 덩어리나 사탕처럼 달콤해서 힘들 때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됐어요. 정말 감사해요. 할머니. 하루빨리 제 꿈인 경찰이 돼 할머니, 가족도 지키고 아빠처럼 다른 사람 손에 목숨을 뺏기는 사람이 없게, 또 그 사람의 부재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없게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낼게요. 그러니까 더 아프시지도 마시고 더 힘들어하지도 마세요. 사랑해요 할머니. 당신은 저에게 항상 꽃이에요. 언제까지나.
* 문화일보 후원,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주최 ‘감사편지 쓰기’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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