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혜 시인 ‘어머니’… 서울 종로구 효자동
6·25 전쟁 前 살았던 효자동
경복高와 담장이 붙어있던 집
어릴적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
전쟁통 피란지서 남편 여의고
여섯 자식 도맡은 고단한 인생
서울집서 찾아 온 옷가지 팔아
오빠부터 차례로 학교에 보내
작은 몸가짐·조용한 목소리로
전쟁의 격랑을 헤쳐나온 전사
나 개인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들 세대의 어머니
아, 어머니
한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내가 쓴 ‘어머니’의 연작 중 첫 번째 시다. 조물주는 인간 모두에게 제각기 의지할 신(神)이 하나씩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일이 다 만들 수가 없어 그대신 어머니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며 그리움의 심원이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은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와 그리움의 심원으로서의 어머니를 더없이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살아 있을 때는 사랑의 슬픔으로 고향을 짓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안타까운 후회를 일깨워서 고향을 짓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꼭 감성적 존재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길러내면서 육신을 키우는 것 못지않게 영혼을 살찌우는 이성적 교육자이기도 한 것이다. 다만 그 교육이 생활 속에 스며 있어 논리적 체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점이 소홀히 되고 있을 뿐이다. 그 두 가지 덕목의 어머니를 회한과 뉘우침의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갖는 보편적 정서를 일깨우고 구체화하고 싶은 욕구로 ‘어머니’를 연작시로 쓰게 되었다.
‘어머니’라는 대상은 일순간의 경험이나 일회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긴 생활을 통한 끝없는 아픔과 그리움, 슬픔의 축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정의 수많은 단층으로 쌓인 체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그 대상의 다면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작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시집 ‘어머니’에 묘사된 어머니는 나 개인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어머니인 것이다.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은 6·25라는 참사를 겪으면서 많이들 남편을 잃고 혼자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치느라 인생을 두 몫, 세 몫의 고난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아름다운 아픔과 가슴 저리는 고마움이 우리가 공유하는 절정의 시적 대상이었고, 나는 그런 어머니상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전에는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경복고등학교와 담이 붙은 집에서 살았다. 우리 집 뒷마당 장독대에 올라서면 경복고 운동장과 교사가 보였다. 평화롭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또 6·25전쟁 전에는 아버지, 고모, 삼촌들끼리 가족신문을 만들어 돌려서 읽는 집안 풍습도 있었다. 그건 조선 영·정조 시대의 학자이며 대시인이었던 백곡 김득신 선생의 직계종손이라는 자부심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작고한 고모나 삼촌은 소설가 지망생 아니면 시인을 일생의 업으로 삼기도 했다.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란 가서 살던 시골집 울타리에 치자나무가 두어 그루 있었다. 치자꽃은 향기도 향기였지만 그 흰 꽃의 아름다움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어머니는 치자 열매의 노란 물감으로 모시옷을 물들이기도 했고, 녹두전의 빛깔을 내는 데 쓰기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떨어진 꽃들을 고이 주워 모아 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신 일이다. 어머니는 미처 떨어진 꽃잎이 없을 때는 치자 열매는 생각하지 않고 싱그러운 꽃을 따서 책상 서랍에 넣어 두시고는 했다. 지금은 치자꽃 보기가 어렵지만 어쩌다 시골 가서 치자꽃을 만날 때면 나는 치자꽃 향기 속에서 불현듯 어머니를 만나기도 한다.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피어오르던 그 꽃냄새를 나는 치자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요즈음에도 어김없이 맡고는 한다. 달밤을 더 하얗게 빛내던 치자꽃의 추억과 그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랑이 나를 감싸 안아 문득문득 그리움에 목이 멘다. 그런 어머니의 정서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시의 길로 들어섰고 ‘어머니’ 연작을 한 권씩이나 쓰게 된 것인지 모른다.
어머니와 함께하기로 한 인생의 긴 여정에서 아버지는 6·25전쟁 중에 우리 가족의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어머니는 서른여섯 나이에 혼자서 여섯이나 되는 자식을 도맡게 되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정월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외롭고 고단한 인생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해 겨울이 지나며 해가 바뀌자 전쟁터는 다시 북쪽으로 옮겨져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아직 민간인들의 통행이 금지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혼자 피란지인 청주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어머니는 어찌어찌해서 군용 트럭을 얻어 탔고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어머니는 효자동 집으로 갔다. 피란을 떠나면서 마당에 묻어 두었던 물건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효자동 일대에는 인민군들과 민간인들의 시신이 즐비했다고 한다. 그 시신들도 마당에 무성하게 자란 풀도 어머니를 막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잡초들이 무성한 마당은 군데군데 파헤쳐져 귀중한 물건들은 이미 없어진 다음이었다. 겨우 한 군데서 손을 타지 않은 독 하나를 찾아내게 되었다. 그 독은 옷들을 넣어둔 독이었다.
어머니는 그 옷가지들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만큼 양껏 싸가지고 다시 한강을 건너 청주로 돌아왔다. 그 뜻밖의 사건은 우리 가족들은 물론 친척들이며 주위 사람들을 다 놀라게 했다. 어머니의 어디에 그런 용기와 힘이 있었는가 해서 다들 놀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몸집이 작은 편인 데다가 성품이 얌전하고 온순하며 부끄러움도 많은 편이었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 종가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벗어나 일 년에 한두 차례 친정 나들이를 할 기회가 생겨도 혼자서는 길 나설 엄두를 못내고 꼭 아버지와 동행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그런 변신에 모든 사람이 놀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어머니의 변신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옷가지들을 시장 담벼락에 걸어놓고 팔기 시작했다.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고 나섰으니 주위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는 모직으로 짠 두루마기, 남색 양단 두루마기, 모본단 치마저고리, 수달 목도리, 여우 목도리 같은 것을 판 돈으로 오빠부터 차례로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전쟁 통에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학교는 무슨 학교냐고 주위 사람들은 어머니의 행동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심지어는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침묵으로 그 많은 말을 물리쳤다. 그건 오로지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약한 여자에서 강한 어머니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는 전쟁 동안에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의식주의 고통을 모르게 해 주셨고 삶을 살아내는 지혜까지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슨 중대한 일을 처리하며 다닐 때는 꼭 오빠를 데리고 다녔다. 그때 오빠 나이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이 어린 큰아들을 마음에 의지로 삼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외롭고 고달픈 삶은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열여덟 해 동안 괴롭혔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은 청하지 않았다.
생전 부엌일이나 막일을 해본 적도 없는 어머니는 넓은 텃밭에 옥수수도 심고 상추도 심고 또 닭도 쳤다. 자식을 키우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았고 교육문제만이 아니라 건강까지도 철저하게 챙기셨다. 어머니는 사대부집 딸이고 며느리였던 과거를 다 버리고 자식들을 잘 키워 내려고 온갖 일을 하는 막일꾼처럼 변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웃들의 부부 못지않게 어머니는 홀로 우리를 꽃피워 내셨다. 아버지 없는 허전함을 그래도 비워 두지 않고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 주셨다. 작은 몸가짐으로 조용한 목소리로 전쟁의 격랑을 이겨낸 전사였다.
어머니는 쉰넷이 되던 봄에 문득 뇌출혈이라는 병명으로 쓰러졌고, 한 달 만에 가까스로 회복을 했지만 또 며칠이 못되어 다시 의식을 잃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한 일생을 사시더니 끝내 부지런하게 인생도 닫고 마셨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불효자 된 죄의식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사무쳐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스무 해 만인 1988년에 ‘어머니’라는 연작시집을 엮어내게 되었다. ‘어머니’ 연작시집은 불효의 회한으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자식의 불효가 이 연작시 52편을 탄생시키게 된 공간이다. 지금 어머니는 고향인 충북 괴산 선산에 계신다.
충청북도 괴산
깊은 산골에
무슨 고요가
이리도 아프답니까
당신이 원하던 것
이루어내
달려와봐도
닫혀진 무덤 열리지 않고
자식의 가슴에서
어머니
오늘 하루 낮이라도
행복으로 묵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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