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승용(사진) 농촌진흥청장에게는 ‘농고 출신’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전북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9급 공무원에서 농진청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일을 하면서 방송통신대에서 학사 학위를, 이후 고려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소위 이런 ‘가방끈(학위)’보다 어떤 일이든 하고자 하는 ‘의지’를 더 강조하는 인물이다. 농업이 미래산업이란 선견이 있어 젊은 시절에 이 분야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먹고사는 게 힘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인 라 청장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농고로 진학했고, 소·돼지·토끼 등 당시에 돈이 된다는 가축을 닥치는 대로 길러 보기도 했다. 대학 진학에 대한 열망이 강해 명문대를 목표로 입시 준비도 했지만, 어느 날 친구가 농촌지도직 시험을 보러 가는데 따라가 함께 시험을 본 뒤 합격하며 이 분야에 발을 들였다.
라 청장은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만들어진 농약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이 기관에 근무하는 모든 연구원이 석·박사였다. 본인 스스로 이들과 비교해 실력이 형편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라승용이 아니다’라는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그는 “남을 시기하진 않았다. 나는 상대방의 장점을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라 청장은 특별히 존경하고 따른 멘토는 없다. 다만 항상 자신과 일하는 주변 사람들의 장점을 어떻게 빨리 받아들일까 고민을 한다. 연구원으로서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일하면서 방통대에 진학해 끊임없이 공부했다. 이후 연구관이 되고, 과장이 되는 모든 과정 속에서 터득한 진리는 ‘못 할 일도 없고 안 될 일도 없다’였으며, 지금도 이 말은 그의 좌우명으로 남아 있다. 보기 드문 연구원 출신 청장으로, 축산·원예·식량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한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본인의 태도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자신이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선 부인하지 않는다. 실제 공무원 생활을 하며 해외여행을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1남 1녀 자식과 가족여행도 못 가 지금 안타깝다고 말할 뿐이다. 매해 6월부터 가을 수확 때까지 벼멸구 방제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는 등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가족에게 신경을 못 써서 미안할 따름이다. 교정직 공무원이었던 아내가 일을 그만두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자신이 아침밥을 거르지 않도록 챙겨준 것에 대해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박정민 기자 bohe00@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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