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시인의 고향이자 문학산실…부산 천마산 일대
천마산 중턱에 자리한 빈민촌
부산 서구 초장동서 유년 시절
하역 작업중 다친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떡·먹거리 팔아 생계
네 남매가 나서서 어머니 도와
우리 삶의 힘이자 꿈이자 영웅
밥 굶지 않고 산다는게 큰기쁨
가난 덕에 일찍부터 효도 체득
주 활동무대였던 ‘충무동 시장’
지금은 옛 모습 찾아볼수 없어
감내골 빨래터·송도 바닷가 등
관광 명소로 탈바꿈…상전벽해
아버지는 1930년대 중반 경북 상주에서 부산 서구 초장동으로 삶의 기반을 옮겼습니다. 신흥 도시 부산의 빈민들이 살고 있는 천마산 중턱 초장동을 사람들은 ‘초또’라고 비하해서 말했지요. 부산항의 부둣가에서 하역 작업을 하며 일용 노동자의 삶을 이어가던 아버지는 하역 작업을 하던 중 발가락을 다쳤습니다. 별다른 치료 없이 노동을 계속하던 아버지는 파상풍으로 상처가 크게 덧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아버지 병수발과 함께, 어머니가 나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떡을 빚어 충무동 시장에 내다 팔고 빈대떡, 국수, 밀주 막걸리, 해장국 등의 먹거리를 내다 팔았지요.
우리 남매는 모두 네 명인데, 어머니가 하는 일을 모두 스스로 나서서 거들었습니다. 무거운 절구로 절구통에 떡을 치고 빻는 힘든 일은 형이 나서서 했고, 불 지피고 떡쌀 치대고 씻는 일은 누나가, 나는 물에 불린 녹두를 넣고 맷돌을 돌리고, 멍석 위에 찐 고두밥 널기, 물 긷기 등을, 여섯 살 아래인 아우(김종철 시인)는 콩나물에 물주기, 부채로 고두밥 식히기 등 아버지를 제외한 온 가족이 제 역할을 스스로 했습니다.
해발 326m의 나지막한 산 천마산 중턱에 내가 태어난 초장동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무 자재와 양철로 손수 지었던 조그만 북향집은 1950년대 말쯤 불에 타 소실됐고, 그 이후에 지은 작은 시멘트 양철집은 지금도 초장동 산복도로 계단 밑에 작은 몸집 그대로 낯선 입주자가 살고 있습니다. 산복도로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 생가에 인접한 운동장이 있었고, 공동 우물터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엔 운동장 끝에 방공호도 있었지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초장동 운동장을 중심으로 나의 시 ‘가족’에서 표현된 ‘천마산 코딱지 같은 우리 집이 있고’ 한 집 건너 아래쪽에 ‘새벽 별을 보며 생선도가로 내려가는 이모 집’이 있으며, 술만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치는 ‘외삼촌 집’이 골목 안쪽에 있어서 오순도순 외가 쪽과 이웃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모가 갖다 주는 생선 머리와 내장 그리고 무를 어슷 썰어서 콩나물과 함께 끓여 놓은 어머니의 해장 술국은 인근에서 소문이 났으며 새벽에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에게 든든한 힘이 됐지요.
어머니의 활동 무대는 언제나 충무동 시장 안에 있었습니다. 기다란 나무 의자와 나무 식탁 위에 차려 내놓는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것은 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데친 생물오징어였으며, 또한 잔치국수였습니다.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빈대떡도 맛있었고, 시루떡과 콩고물, 팥고물에 버무린 찰떡 또한 맛있었습니다만, 팔다가 남은 음식만이 우리 차지입니다.
커다란 양은 솥의 끓는 물 속에 국수다발을 넣고 기다란 나무막대로 휘젓던 어머니의 모습은 내 유년 시절의 지평 속에 아직도 충무동 시장과 함께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충무동 시장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하철 자갈치역 1번 출구로 나와서 본 충무동 시장 그 자리에는 오래전 천일 여객 건물이 들어섰다가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전자제품 상점과 볼링센터, 모텔들이 들어서 있을 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옛 충무동 로터리 광장 한가운데 거대한 고래 갈비뼈를 아치형으로 세워 만든 조형물도 사라졌습니다. 그곳 충무동 로터리는 해방 전부터 우리나라 정치·사회단체가 주요 집회 장소로 사용하던 부산의 대표적 광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차량이 다니는 사통팔달의 교통 요지로 변해 있지요.
천마산 중턱에는 아미동에서 송도 쪽으로 넘어가는 초장동 산복도로가 지나갑니다. 생가가 있는 지금의 초장중학교께에서 언덕 아래쪽을 내려다보면 옛 부산의 중심 시가지가 다 들어와 보입니다. 영도의 고갈산 아래 남항동 앞바다가 보이고, 영도다리와 그 너머 부산대교, 용두산 타워와 남포동, 자갈치 시장, 그 앞에 충무동이 훤히 보입니다. 초장동 언덕에서 충무동 시장까지 걸어 내려가면 15분쯤 걸립니다. 내가 쓴 시 ‘영도다리’에는 “천마산 초장동 말랭이에서 바라보는 영도다리는 / 시계가 없는 초장동 사람들의 자동시계 /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들어 올려지는 영도다리는 / 눈으로 보는 시계 / 컴컴한 새벽 5시에 울리는 예배당 종소리는 귀로 듣는 시계” 초장동 사람들은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합니다.
초장동 3가 75번지를 중심으로 천마산에 인접한 옛 지명(地名)도 재미있습니다. 천마산 아래 북쪽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곡정이라 불렸지요. 지금은 아미동이 행정 주소지만 골짜기 아래로 연기를 뿜는 화장터의 큰 굴뚝이 보였지요. 그 위쪽에는 천마산 공동묘지가 있어 무서웠어요. 공동묘지가 있는 산을 넘어가면 천마산 뒷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감내골(甘川)이 있어 어머니는 빨래거리를 잔뜩 이고 와서 솥에 빨래를 삶고 방망이로 두드렸지요. 이곳이 지금은 그 유명한 ‘감천문화마을’로 화려하게 모습을 바꿨지요. 또 천마산 중턱 골짜기의 윗부분은 오방골 동네, 그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소를 길렀던 소막골, 돼지를 길렀던 돼지막골, 그 아랫동네로 더 내려오면 일제강점기 때의 기생들이 나그네를 유혹하던 홍등가 청루골이 있습니다. 청루골로 불렸던 지금의 완월동에는 그 시절의 잔재였던 사창가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밤사이 사건·사고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일제는 그곳에 완월동 고반소(지금의 파출소) 건물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부산에 비해 오늘의 부산은 정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놀라운 변화를 보여줍니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자리 잡은 해운대의 변화도 그렇지만 천마산 주변과 송도 해안도로 일원에 조성된 또 하나의 관광 명소는 초장동 태생의 출향인마저 놀라게 합니다. 천마산 뒷골짜기의 ‘감천문화마을’을 비롯해 ‘천마산 10리 숲길’, 테마공원으로 조성된 ‘천마산 조각공원’ ‘천마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부산의 옛 도심지 야경(夜景)은 이국적으로 특별한 황홀감마저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추억 속의 천마산은 생동하는 신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야생의 작은 짐승처럼 참꽃 꽃잎 따먹으며, 할미꽃 꺾어 손에 쥐고 산꼭대기에 선 채로 먼 수평선 위의 배와 그 너머 언뜻언뜻 보이던 대마도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한 소년의 등을 그 산은 아직도 토닥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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