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속 한 장면.
장길수(오른쪽) 감독이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첫 촬영지였던 서울시립대를 최근 양경미 영화평론가와 함께 찾아 되돌아봤다. 장 감독은 극중 주인공 남녀가 캠퍼스에서 사랑을 키웠던 장면을 찍었던 것을 설명하며 감회에 젖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장길수(오른쪽) 감독이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첫 촬영지였던 서울시립대를 최근 양경미 영화평론가와 함께 찾아 되돌아봤다. 장 감독은 극중 주인공 남녀가 캠퍼스에서 사랑을 키웠던 장면을 찍었던 것을 설명하며 감회에 젖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이 된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곽 샌타모니카 공원. 야자나무 가득한 샌타모니카 공원에서 촬영된 영화는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사진 = 양경미 평론가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이 된 미국 로스앤젤레스 외곽 샌타모니카 공원. 야자나무 가득한 샌타모니카 공원에서 촬영된 영화는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 사진 = 양경미 평론가

(120)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배경 서울·LA

30년전 해외여행이 낯설던때
LA·뉴욕·파리·빈 등서 촬영
‘베니스 女優賞’의 강수연 주연
서울만 32만명 동원 흥행성공

외골수의 고집불통 시골청년과
자유분방한 ‘팜 파탈’의 만남
시대·윤리·관습 탈피에 안간힘
쾌락·허영속 비극적 사랑 그려

시립대서 불꽃 튄 첫만남 촬영
도서관 등 ‘순수의 시절’ 표현
LA 코리아타운·샌타모니카선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담아내


휴일이 많은 5월은 해외여행 성수기다. 지난해 한국은 인구 대비 출국자가 가장 많은 나라 1위에 자리했다. 1989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면서 이제 외유가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불과 3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해외여행이 생소했던 시기, 외국의 풍광은 영화를 통해서만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장길수 감독의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던 해, 서울을 시작으로 로스앤젤레스(LA), 뉴욕, 파리 그리고 빈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돌며 촬영했다. 영화계 안팎의 높은 관심 속에 개봉된 영화는 서울에서만 관객 32만 명을 동원했다.

영화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 연출자인 장길수 감독을 최근 만났다. 장 감독에 따르면, 영화는 1990년 설날 연휴에 맞춰 1월 26일 개봉했는데, 그날은 3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단관 개봉이던 시절이었다. 장 감독은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서울 을지로4가에 위치한 국도극장에 갔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폭설을 맞으며 길게 줄을 서 있었고, 그는 그 장면으로 흥행을 예감할 수 있었다. ‘추락하는…’이 해외 로케이션 영화로 주목을 끌고 성공을 이루자 그때부터 해외 촬영이 한국영화계에서 붐을 이뤘고 하나의 제작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가 함께했던… 우리의 쓸쓸한 사랑과… 현란한 추억에 어울리는 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형빈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추락하는…’은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액자 구성을 따른다.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임형빈(손창민)은 어느 날, 교정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윤주(강수연)를 보고 매료된다. 고지식한 형빈은 윤주의 과거사를 듣고 헤어지지만 다시 만나 동거 생활을 한다. 그러나 윤주 언니의 죽음에 이어 형빈 아버지의 상경으로 또다시 헤어지면서 윤주는 언니가 살았던 미국으로 가고 형빈은 대기업에 취직해 결혼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LA지사로 파견 간 형빈은 윤주와 재회해 새롭게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향락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공금까지 횡령하는 바람에 해고된다. 뉴욕으로 옮겨 막노동하며 생활을 이어가지만 그마저도 부동산 사기를 당한다. 희망을 잃고 삶이 지긋지긋해진 윤주는 그에게서 도망치지만, 형빈은 기어코 윤주를 찾아낸다. 생을 끝내겠다는 절망으로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형빈에게 윤주는 안간힘을 다해 말한다. 진심으로 사랑했었노라고.


젊은 날의 슬픈 초상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문열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88년 자유문학사가 출간한 이 소설은 사랑에 집착하는 형빈이 자유분방한 윤주를 만나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 비극의 로맨스다. 이 작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류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시구에서 따온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제목으로 책을 발간했다.

당시 영화계의 세대교체를 이끌고 있던 장 감독은 이 소설이 일간지에 연재될 때부터 영화화할 것을 염두에 뒀다고 했다. 직접 각색을 맡은 그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당시 24세였던 배우 강수연의 연기도 한몫했다. 서윤주는 카르멘 같은 여자다. 여러 남자를 유혹하는 매력적인 외모와 집시 같은 자유분방한 성격, 미래보다 현재의 쾌락에 집착하다가 애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까지 겪는, 그런 복잡한 캐릭터를 펼쳐 보이는 강수연의 연기는 절묘했다.

장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강수연을 캐스팅하기는 쉽지 않았다.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인기가 워낙 높아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강수연이 이 작품에 응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던 셈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화는 배우 최민식에 관한 것이다. 당시 조감독이 극단에서 연기 잘하는 무명의 최민식을 캐스팅했는데 배역의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최민식은 미대생 역을 소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설정해 많은 소품을 준비했지만 영화에 반영되지 못했다. 그는 서운한 마음에 술자리에서 장 감독에게 대들고 달아났다. 장 감독은 그런 열정이 지금의 배우 최민식을 있게 만들었다며 높게 평가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사랑과 미움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20대부터 30대까지 인생에 있어 가장 열정적인 시기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들은 시대 상황에서 도피하고 윤리와 관습, 도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들의 노력은 처절하고, 그래서 애처롭다. 서로를 불행으로 이끈 그들의 삶 속에서 죽음은 한 줄기 빛과 같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어 다시 비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던 1970년대를 전후로 펼쳐지는 두 연인의 비극적 삶은 서울과 미국이라는 공간을 대조시킨다. 외골수 시골청년이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는 과정이 서울에서 펼쳐진다. 대학캠퍼스, 도서관, 시골집은 순수하고 낭만적인 그들의 애틋한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 된다. 반면 쾌락과 허영에 들떠 파국으로 치닫는 삶은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그려진다.

영화 속 배경인 서울대의 실제 촬영지는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서울시립대다. 서울시가 설립해 운영하는 유일한 대학인 서울시립대는 최근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학교 규모는 크지 않지만 요즘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빨간 벽돌건물이 여러 동 있으며 학교를 관통하는 중앙로의 조경도 예쁜 것으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TV 드라마 ‘내일은 사랑’(1992)과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2010), ‘마이 프린세스’(2011),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2012), ‘오자룡이 간다’(2013) 등이 촬영됐고 영화 ‘7급 공무원’(2009)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장 감독은 첫 촬영, 즉 크랭크인을 이곳에서 했다며 감회를 드러냈다. 신록이 싱그럽게 피어나는 5월의 교정, 빨간 벽돌건물이 눈에 띈다. 이 건물은 형빈이 윤주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을 찍었던 장소. 윤주가 등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었던 그 장소도 여전했다. 영화를 촬영했던 그때도 지금과 같은 계절이었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촬영지는 건물들이 보존돼 있어 캠퍼스의 낭만과 운치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대학교가 배경인 만큼 다양한 공간이 등장하는데 도서관은 시립마포도서관에서 촬영했고 윤주가 연극 공연을 했던 곳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실험극장(實驗劇場)이다. 실험극장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연극부 출신들을 중심으로 1960년에 창단한 민간 연극단체로 이순재, 오현경, 박정자, 윤석화, 송승환 등 잘 알려진 연극배우들이 이 극장을 거쳤다. 영화 속 실험극장은 1992년 운현궁 복원사업으로 극장을 옮기기 전의 모습이다.

미국에서의 촬영은 LA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이뤄졌다. 장 감독은 지금은 다양한 장소를 섭외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당시로써는 빠듯한 제작비와 바쁜 일정 탓에 해외 촬영스태프를 최소한 인원으로 꾸릴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헌팅 장소도 섭외가 수월한 장소 위주로 진행됐다. 극 중 형빈이 근무하던 지사는 LA코리아타운에 위치한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LA지사에서 촬영했다. 뉴욕으로 건너가 야채가게에서 막노동하는 장면도 코리아타운에서 찍었다. 그 덕분에 영화를 보면 LA의 익숙한 장소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운타운과 코리아타운, 샌타모니카와 베니스비치가 그렇다. 특히 형빈이 공금을 횡령하고 발각돼 도망치는 장면은 야자나무가 인상적인 샌타모니카 해변을 배경으로 한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샌타모니카 해변과 공원 그리고 베니스비치는 영화의 주된 배경이자 촬영지였다. 샌타모니카 해변은 야자나무가 줄지어 있어 남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국적인 모습이다.

윤주와 형빈이 조우한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촬영지는 스타더스트(stardust)호텔이다. 1958년에 오픈한 스타더스트호텔은 빨간색과 파란색을 조화시킨 건물 외관으로 유명하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6), ‘카지노’(1996), ‘쇼걸’(1995) 등이 이 호텔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미국 중년층이 가장 사랑하는 호텔 중 하나이며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스타더스트호텔 부사장이 라스베이거스 한인 회장이었던 재미교포 조길호 씨였다. 카지노 딜러들도 재미교포가 많아 한국 관광객들이 호텔을 자주 찾았고, 이 덕분에 촬영지를 스타더스트호텔로 섭외할 수 있었다고 장 감독은 상기했다. 스타더스트호텔은 2007년 3월 13일 새벽 불꽃놀이와 함께 폭발 해체됐고, 지금은 새로운 호텔이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극 중 윤주는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 끝없이 미국을 동경하고 한국을 부정하고 경멸한다. 한국에서 엘리트였던 윤주가 막연한 희망과 동경으로 미국행을 택한 후 낯선 타국에서 씁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60∼1970년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했던 많은 한국인은 암울한 현실을 탈피, 한 번쯤 높이 날고 싶은 희망과 욕망이 있었다. 타국에서 밤잠을 아끼는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뜻을 이룬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기에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허황된 욕망과 허영에 들떠서 파멸의 길로 치닫고 좌절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큰 뜻을 품고 멋지게 창공을 날아 보고 싶은 욕망, 그러나 환상만 존재하고 현실성이 결여된 허황된 날갯짓은 비참한 추락을 만든다. 영화는 시원하게 펼쳐진 미국 서부의 모습과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주면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일깨우는 주제의식을 담아냈다.

양경미 영화평론가

관련기사

기사 추천

  • 추천해요 0
  • 좋아요 0
  • 감동이에요 0
  • 화나요 0
  • 슬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