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할머니 사업은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키운다’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아름다운 풍습을 되살리는 역할도 한다. 지난 14일 서울 용산구 상록어린이집에서 명지수 이야기할머니가 유아들과 수업을 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키운다’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아름다운 풍습을 되살리는 역할도 한다. 지난 14일 서울 용산구 상록어린이집에서 명지수 이야기할머니가 유아들과 수업을 하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
명지수 이야기할머니

56~70세 여성 대상 사업으로
‘할머니 무릎 교육’ 인성 함양
올해만 유아 47만명 수업받아
전국 어린이집 만족도 ‘90점’

높은 경쟁률 뚫고 선발뒤에도
교육·실습 반복 ‘6개월 특훈’

“우리가 아이들을 잘 품어주면
훗날에도 기억할거란 자부심
규칙적 생활에 건강도 챙기죠”


지난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백범로 상록어린이집의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수업시간. 오늘의 이야기는 ‘한강에 다리를 만든 선비 정약용’이다. “선비 정약용이 나오는 이야기 속으로 모두 출발∼. 빵빠라∼빵!” 명지수(67) 씨와 유아들이 어느새 하나가 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팡파르를 울린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한시도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빠져들었고, 서로 먼저 손을 치켜들며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선비 정약용의 능력을 정조 임금님이 신뢰해줘서 정약용은 반대가 많았지만 한강에 과학 원리를 이용해 배다리를 만들 수 있었지요? 여러분이 부모님의 신뢰를 받은 경험을 말해볼까요?” 오늘의 주제를 갖고 대화를 나누며 수업은 마무리됐다.

이날 명 씨의 수업을 지켜본 느낌은 ‘프로’라는 것이다. 20분 수업에 조금도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내고, 돌발상황에서 순발력은 물론 아이들 하나하나를 일일이 배려해 관심을 주는 수업 테크닉이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2009년 시작된 ‘이야기할머니’ 사업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이 사업은 은퇴하거나 자식들을 다 키운 여성(만 56∼70세)들에게 삶의 지혜와 경륜을 사회에 제공할 기회를 줘 생활의 보람과 함께 만족스럽진 않지만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하며 만들어졌다. 동시에 ‘할머니의 무릎교육’을 통해 우리 위인들의 가르침과 미담을 전달해 어린이의 인성을 함양하자는 취지도 들어 있다.

처음에 한국국학진흥원이 대구·경북지역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권역을 넓혀 2014년에 문화체육관광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국학진흥원이 주관하는 전국적인 사업이 됐다. 올해에만 연인원 47만여 명의 유아가 수업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 중요성이 만만치 않다. 유아기의 교육은 평생을 가기도 한다.

이날 20분씩 3교시의 수업을 마친 명 씨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여성의 평균적 삶과 노령 유휴 인구의 문제를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 사업의 취지와 중요성이 더 다가왔다. 명 씨는 일흔을 바라보지만, 외모나 목소리는 ‘할머니’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젊다. 요즘 대다수 60대 여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살아온 과정도 그렇다. 직장생활을 했고 초·중등학생의 독서논술 지도도 하는 등 일을 하며 자식 셋을 결혼시켰다. 딸이 아이를 낳고 직장생활을 계속하느냐, 육아에 전념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대개 그렇듯, 할머니인 내가 일을 그만두었어요. 손주 육아를 마치고 나니, 제가 ‘경단녀’ 아닌 경단녀가 돼 있더군요.”

일거리를 찾으며 이것저것 공부하다가 국학진흥원의 ‘이야기할머니’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됐다. 2013년 5기 이야기할머니를 뽑을 때였다. 당시 전국 평균 경쟁률이 3.7대 1이었지만, 서울은 경쟁이 훨씬 높았다고 보면 된다. 2016년 서울의 경쟁률은 45.5대 1이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해 면접을 보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난다, 긴다’하게 생긴 할머니들이 몰려왔더군요. 어디 되겠나 싶었는데 선발이 됐어요.” 이렇게 많은, 능력 있고 건강한 여성 노인이 일거리를 찾아 몰린 걸 보면서 애잔하기도 했다.

선발 후 6개월의 교육과정도 ‘빡세다 ’할 만큼 어렵다. 합숙도 있고, 20여 명씩 반을 이루어 교육과 실습을 반복한다. 지도교사가 일일이 이야기를 외어 발표하게 하고, 하나하나 바로잡아주는 과정이 반복된다. 어린이집에서 발표하는 내용은 체계적으로 국학진흥원에서 틀을 잡고 그림 교재를 만든다. 이야기할머니에 대한 전국 어린이집들의 만족도가 90점을 오르내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명 씨의 경우 일주일에 월·수요일 3교시씩, 목요일 2교시 수업을 한다. 사실 젊은 교사도 20분씩 3교시를 연이어 하면 힘이 든다. “수업 준비를 위해 교재를 외우고 공부도 하는 게 시간도 걸리고 힘이 들지만, 아이들 앞에 앉아 할머니를 기다렸던 아이들의 눈빛을 받으면 갑자기 힘이 나서 수업이 고되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 어릴 적 듣던 어른들 말 중에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키운다’는 게 있잖아요. 동료 이야기할머니들과 모임을 자주 하는데, 학교 때 친구들과는 분위기가 달라요.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에게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주제로 모여요. 우리가 아이들을 잘 품어주고 가르치면 나중에 분명히 이 시절을 기억할 거야, 하는 생각이 이야기할머니들 사이에 잠재해 있는 거 같아요.”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산업화·도시화로 끊어진 공동체의 전통을 아주 작게나마 회복시킨다고 해야 할까.

이런 얘기도 더했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TV는 물론 라디오도 없어 동네에 한군데 설치된 스피커로 라디오를 듣던 시절이에요. 그 앞의 평상에 동네 어른들이 일감을 갖고 모이고, 지금으로 치면 어린이집 다닐 나이의 저희 또래는 어른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쏟아질 듯한 별을 보다가 잠이 들곤 했잖아요. 저희가 그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요. 저는 그때 감정이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생각나요. 도시나 시골이나 살림 형편이 다 고만고만하던 시절이지만, 도시에서 자란 친구들은 이런 기억이 없더군요.” 명 씨의 진솔한 말 속에 ‘이야기할머니’ 사업의 목적과 취지, 앞으로도 잘 진행돼야 하는 이유가 모두 담겨 있는 듯했다.

건강에도 이야기할머니 활동은 큰 도움을 준다. “저희 나이에 일 안 하는 친구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걱정을 한다고 해요. 저는 눈뜸과 동시에 할 일이 정해져 있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인지 따로 운동하지 않아도 적절히 건강이 유지됩니다. 아이들에게 느끼는 보람, 동료들과 어울림, 예를 들어 가족 여행도 저의 방학 일정에 맞추어 가는 등 가족과 사회에서의 ‘존재감’ 같은 게 종합적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야기할머니 선발에서 학력 제한은 없지만, 합격자의 절반가량이 대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어 그 연령대의 학력 분포에 견준다면 대한민국 여성 노인 고급인력의 집합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은 이야기할머니의 활동 보수가 노력과 능력, 긍정적 영향에 비해 너무 낮다는 것이다. 몇 교시를 하든 상관없이 수업하는 날 일당 개념의 활동비로 3만5000원이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지급된다.

“대부분 이야기할머니들은 활동비 얘기는 마치 금기처럼 말하지 않는 분위기예요. 그보다는 아이들 교육을 한다는 긍지와 자부심, 여성 노인으로서 일을 가졌다는 자존감 같은 게 더 크기 때문일 거예요. 해마다 이야기할머니를 뽑지만, 저는 더 많은 열정을 가진 여성 노인들이 도전해 엔(N)분의 1씩 보람과 건강을 나눠 갖기를 바랍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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