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 폴락 감독 ‘추억’
미국 배우 겸 영화감독인 시드니 폴락의 1973년작 ‘추억’(사진)은 1930년대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케이티(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입만 열면 정치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피 끓는 예일대 여대생이다. 캠퍼스에서 스페인 내전 중단에 관한 전단을 돌리고 있던 케이티는 허벨(로버트 레드퍼드)과 마주친다. 그는 학교에서 소문난 절세미남이자 승승장구하는 운동선수이기도 하다. 케이티는 정치와 사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허벨을 열렬히 사모한다. 화려한 배경의 허벨에 비해 케이티는 너무나도 초라하다. 어두운 갈색 곱슬머리를 하고 마르크스의 책을 안고 다니는 케이티를 허벨이 좋아할 리 만무하다. 학교 파티에서 허벨과 춤을 추고, 집 앞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는 등 소소한 ‘기적’이 일어나긴 했으나 결국 큰 이변 없이 케이티의 대학 생활은 끝이 난다.
시간이 흘러 케이티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허벨은 해군에 입대해 복무 중이던 때에 이들의 인생이 기적처럼 교차한다. 바에서 새하얀 군복을 입은 채 술에 잔뜩 취해 있는 허벨을 케이티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빨간 립스틱에 덮인 케이티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한다. 케이티는 예전보다 몇백 배 더 멋져진 허벨을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 한다. 결국 케이티는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허벨을 침대에 눕힌다. 허벨의 옷을 벗기는 동안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그가 깰까 봐 케이티는 숨을 고른다. 마침내 잠든 그의 옆에 누웠을 때 케이티의 입에서 가증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혁명을 외치고, 동참하지 않는 자들을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던 케이티지만 이 남자 옆에 맨살을 대고 누워 있는 것만으로 세상을 구한 듯한 환희가 느껴진다.
잠든 허벨도 케이티의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어느새 눈을 뜬 허벨이 케이티에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한다. 그와 맞닿는 케이티의 전신이 요동친다. 케이티는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그를 더 깊이 새겨넣기 위해 혁명가가 아닌 요부가 돼 그의 신음을 들이마신다. 허벨의 땀이 케이티의 전신에 흘러내린다.
시간이 흘러 재혼한 케이티와 다른 여자와 뉴욕 거리를 걷던 허벨이 우연히 마주친다. 케이티는 사회운동가로, 허벨은 시트콤 극작가로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반가움과 안도로 시린 추억의 작은 일면을 떠올린 두 사람은 ‘함께’ 미래를 희망할 수 없었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헤어진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제작비(1500만 달러)의 3배가 넘는 4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흥행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를 빛나게 한 것은 단지 흥행 수익만이 아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직접 부른 ‘더 웨이 위 워(The Way We Were)’는 아카데미 음악 부문에서만 두 개의 상을 수상했고,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 대신 아린 흔적만 남겨 놓은 사랑의 이면을 추억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방금 이별한 것처럼 가슴이 쓰리다. 많이 사랑했을수록 몸에 닿았던 열기는 더 빨리 식는 것임을 구슬프면서도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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