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복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선친이 뒤늦게 출생신고 한 탓에
호적 나이는 실제보다 두 살 적어

대학은 못 가고 군대는 면제받아
문단 생활 내내 최연소 기록 행진

‘을’이 ‘갑’보다 행복함을 터득해
선배는 모시고 후배는 사랑했다


어렸을 때, 서너 살 더 먹은 형들을 따라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미 초등학생들과 놀았고, 초등학교 3∼4학년 때는 중학생들과 어울렸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들과 뒤섞였고,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생 이상의 청년들 틈에 끼여 격의 없이 지냈다. 그 반면, 동갑내기 등 내 또래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애어른’ 또는 ‘조숙한 아이’라 일컬었다. 과연 그랬을까. 사실은, ‘애어른’이거나 ‘조숙한 아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필요했기 때문에 선배들이 자기들 틈에 나를 끼워준 것뿐이었다. 선배들은 종종 내게 이것저것 무슨 일을 시켰지만, 내가 선배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뭔가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선배들이 ‘갑(甲)’이라면 나는 항상 ‘을(乙)’이었다.

한편, 내 나이는 호적상으로 만 두 살이 줄었다. 실지로는 1951년생인데 호적에는 1953년생으로 등재됐다. 내 위로 동기간이 무려 3남매나 잇달아 사망하는 바람에 선친(先親)께서 이 녀석도 혹여 또 죽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조심조심 지켜보다가 끝내 죽지 않고 살아나자 출생신고를 늦게 한 탓이었다. 필자는 이 호적 나이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내 호적 나이는 만 16세였다. 법적으로 아직 18세에 미치지 못해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동기생들은 공무원이다 은행원이다 속속 안정된 직업을 찾아 나섰지만, 나는 연령 미달로 응시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터라 절망에 가까운 밑바닥을 헤맸다.

물론 미래의 희망은 문학이었지만, 우선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던 것일까…. 필자는 객지를 떠돌며 피눈물 나는 중노동과 사투(死鬪)를 벌였다. 호적 나이 오류로 인한 폐해(弊害)와 불이익은 최근까지 따라왔다. 지하철 요금 면제와 국민연금 수령이 2년 늦어졌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었더라면 정년(停年)까지 최소한 2년 더 근무할 수 있었겠지만, 내 직업의 경우 근무연한(勤務年限)과는 거리가 멀다. 향토예비군 훈련과 민방위대 교육만 남들보다 2년 더 받았을 뿐이다.

아무튼 사회로 진출하고부터 내게는 ‘애어른’이나 ‘조숙한 아이’ 대신 곧잘 ‘최연소(最年少)’라는 수식어(修飾語)가 따라붙었다. 더욱이 필자는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군대에도 가지 못했다. 징병검사에서 ‘갑종’을 받았지만, 극빈으로 ‘소집면제’ 판정과 함께 ‘4급 보충역’으로 편입됐다. 대학 4년, 군대 3년을 건너뛴 필자는 동년배(同年輩)들보다 약 7년 앞서 직업전선에 나섰다. 호적상 줄어든 만 두 살까지 감안하면 동년배들과의 사회경력 편차는 무려 9년으로 벌어진 셈이었다. 최연소 딱지가 따라붙는 것은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다. 연장자(年長者)들 틈에서 최연소자는 언제나 ‘을’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호적상 만 18세가 되어 어느 잡지사에 들어갔을 때 나는 단연 최연소 기자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무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1973년 두 살 아래 직장 후배들과 나란히 ‘성년의 날’ 행사에 초대받았을 때에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특히, 후배들이 동갑이라면서 ‘맞먹으려’ 덤빌 때는 이만저만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해 문화공보부 주최 문예 작품 현상공모 장막희곡 부문에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했다. 시·시조·소설·희곡·아동문학 등 여러 부문을 통틀어 모든 입상자 중 최연소자였다. 그때 내 나이는 23세, 만 22세, 호적 나이로는 20세였다. 그 당시 극작가(劇作家)들의 모임인 ‘극작워크숍’ 회원 중 가장 나이가 적었고, 1974년 제10회 ‘신동아’ 논픽션 현상 공모에 역시 최연소로 당선했다. 1977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완료, 1979년 ‘월간 독서’ 장편소설 현상 모집에 당선했다. 이 모두가 20대 청년 시절에 이룩한 문학적 성과들이었다.

그 무렵 문단은 연장자 일색이었고, 동년배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문단 경력이 쌓이자 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한국소설가협회 등 여러 문학단체 안에서 항상 최연소 임원으로 선출됐다. 한국문인협회의 경우 1992년 제19대 집행부 최연소 이사로 선임된 이후 제23대까지 연임했고, 2007년 제24대 소설분과회장 당선을 거쳐, 2011년 제25대 최연소 부이사장 당선, 2015년 제26대 임원선거에서 또다시 최연소 부이사장으로 재선됐다. 최연소 기록의 행진이었다.

이제는 시대 상황이 바뀌었다. 신인(新人)들의 등단 연령이 아주 높아졌다. 신문학(新文學) 초창기에 등단한 신인은 대부분 20대 청년들이었다. 이 같은 전통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1980년대 이후 근래에 등장한 신인들을 보면 나이 지긋한 장년층이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지금까지 필자가 문단에서 세운 일련의 최연소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전망이다.

이처럼 문단이 변화하는 동안 필자는 문학단체의 중심에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을’의 길을 걸어왔다. 선배들을 극진히 모셨고, 후배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필자에게는 분명한 사상과 철학이 있다. 문인이 문인을 존중하지 않으면 문인은 독자와 다른 계통의 종사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 자신부터 선후배 문인들을 제대로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필자는 ‘을’이 되어 다른 문인들을 ‘갑’으로 섬겼다. 특히, 문학단체 안에서 직위(職位)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한껏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을’이 ‘갑’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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