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기능이 지워진 대신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서울 홍익대 앞의 ‘청춘마루’. 내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노란색 계단이 인상적인 건물로 공간들은 사람들의 쓰임새에 따라 적응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은행의 기능이 지워진 대신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서울 홍익대 앞의 ‘청춘마루’. 내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노란색 계단이 인상적인 건물로 공간들은 사람들의 쓰임새에 따라 적응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서교동 KB ‘청춘마루’

대학 앞 지켜온 김수근 작품
은행기능 약해지자 활용 모색
건축과 교수 복합문화공간 제안

공연·전시에서 만남 장소까지
형식 구애 없이 자유롭게 이용
4월 개관뒤 벌써 사람들 북적


동네에서 자주 가는 은행이 오랫동안 가림막에 가려져 있는 것 같더니 어느 날 새로 지은 옆 건물로 이전한 사실을 알게 됐다. 1층의 넓은 공간을 차지했던 종전과는 달리 작은 규모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코너만 1층에 남겨둔 채 2층으로 이전했다.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은행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4대 시중은행의 영업점 수는 전년에 비해 212개가 줄었다고 한다. 은행의 업무가 비대면 서비스로 진화하면서 많은 수의 영업점이 필요 없게 된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던 은행점포를 매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점포를 매각만 한 것은 아니다. 일부 은행점포는 남는 공간을 카페나 전시장으로 조성해 고객들을 위한 시설로 제공하고 있다. 롯데월드의 우리은행은 도넛 전문점과 함께하는 ‘베이커리 인 브런치’를 선보였고 광화문의 하나은행은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힐링서점’으로 변신했다. 은행의 이러한 변신을 ‘슬로뱅킹(Slow Banking)’이라 하는데 은행에서 금융업무뿐 아니라 문화예술,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게 해 방문객이 오래 머물고 자주 찾을 수 있게 하는 전략이다.

앞선 사례들이 은행 일부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한 것에 반해 홍대 앞 ‘청춘마루’는 은행의 기능을 지우고 건물 전체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한 예다. 청춘마루에서 은행의 흔적은 건물 한구석 ATM코너에서 확인될 뿐이다. 국민은행 서교동지점이었던 이 건물은 유명한 건축가인 김수근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홍대 앞을 지켜온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홍대 앞이 급격하게 상업화되면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건물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은행이 보유한 건물인 덕에 최근까지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행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자 이 건물에 대한 다양한 활용방법이 모색됐고 인근의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들이 나서서 이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게 됐다. 제안이 받아들여지고 청년들이 선호하는 지역인 홍대 앞에 걸맞은 청춘마루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이 문을 열었다.

‘청춘마루’ 2층 갤러리 공간에 전시 중인 신발들. 작가의 터치가 가해진 ‘작품 신발’들이며 원하면 구매할 수도 있다.
‘청춘마루’ 2층 갤러리 공간에 전시 중인 신발들. 작가의 터치가 가해진 ‘작품 신발’들이며 원하면 구매할 수도 있다.

청춘마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건물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노란색 계단이다. 기존 건물의 바닥과 천장을 비워내고 설치한 이 노란색 계단은 지하에서 옥탑까지 이어진다. 지하에서는 공연을 위한 스테이지인 계단이 1층에서는 가로로 열린 옥외공간이 되고 다시 2층에서는 실내 갤러리가 됐다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의 루프톱이 되는 실내와 실외공간으로의 변신을 거듭한다. 편의상 계단에 의해 조성된 각각의 공간은 이름이 있지만 특정한 기능으로 제한되지는 않는다. 공간들은 사람들의 쓰임새에 따라 적응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알아서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노트북으로 무엇인가 작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고, 또 다른 쪽에는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놀이터인 양 분주하게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공간을 사용하고 있지만 불편하거나 이상하지 않게 조화를 이룬다. 물론 조금 더 개별적인 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전예약을 통해 세미나실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밤이 되면 1층 옥외공간의 천장에 반사된 길거리 행인들의 움직임이 계단 사이로 비치는 조명을 배경으로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노란색 계단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올 4월에 개관한 청춘마루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일본의 쓰타야(조屋) 서점을 기획, 운영한 마스다 무네야키에 따르면 최고의 장소를 실현하니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카페 자리가 부족하거나 레스토랑의 예약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청춘마루 역시 공간운영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공간을 채울 매력적인 문화콘텐츠가 필요하다. 홍대 앞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고 있고 길거리 공연에서 보듯이 자발적인 문화가 있는 곳이다. 청춘마루가 이 다양하고 자발적인 홍대 앞의 문화콘텐츠를 수용할 수 있는 멍석 같은 플랫폼 공간이 돼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성장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건축가·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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