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독일의 루프트한자 민항기를 이용해야 했다. 일반 운항노선에서 서울만 끼워 넣은 형식이어서 홍콩, 방콕, 뉴델리, 로마 등 무려 7곳을 경유했다. 당초 ‘동맹국’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 민항기를 임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음 해 5월 린든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할 때는 미국 측이 보내준 전용기 보잉 707을 이용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탑승하면서 “다시는 빈곤과 굴욕이 없는 자주, 자립의 역량을 배양해야겠다”고 비장한 어조로 얘기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 방문을 할 때는 일본에서 미국 항공사인 노스웨스트 항공기로 갈아탄 뒤 시애틀과 시카고를 거쳐 사흘 만에 미국에 도착했다. 존슨 대통령의 호의 이면에는 월남 파병 요청이 있었다.
대통령이 대한항공 특별기를 활용한 것은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부터였다. 아시아나항공이 제2 민항사로 설립된 이후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교대로 이용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0년부터 B747 기종을 임차해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로 활용 중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0일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싱가포르를 방문하면서 전용기인 ‘참매 1호’ 대신 리커창(李克强 ) 중국 총리 전용기인 보잉 747기를 빌려 탔다. ‘최고 존엄’ 운운하며 자존심을 세워온 북한이 이미 단종된 러시아산 IL-62 전용기 대신 중국이 내준 전용기를 이용한 것은 자존심보다 김 위원장의 안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지난 1983년 참매 1호와 같은 기종이 아프리카에 추락해 23명이 사망했고, 2014년에는 최룡해 부위원장이 러시아에 가다 고장으로 회항한 적도 있다. 그런데 북한 관영 매체인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은 이례적으로 11일 김 위원장이 중국 전용기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함께 사진도 대대적으로 실었다. 예전 같으면 자존심 상한다고 이런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을 텐데 변화된 모습이다.
53년 6개월 전 박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와, 지금 김 위원장이 중국 비행기를 빌려 타고 싱가포르를 간 심정은 비슷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굴욕을 경제 개발의 열정으로 승화시켜 산업화에 성공했듯이 김 위원장도 핵을 버리고 경제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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