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를 지향하다
포퓰리즘 꾸짖다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정치적 공과는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만큼이나 역설적이다. 그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쿠데타를 주도했고 1965년 한일 기본조약(국교정상화)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배상금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는 등 ‘무항산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의 마음으로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했고 그 중정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대중(DJ)을 납치하는 등 박정희 장기집권의 일등공신이 됐다.
그러나 그는 DJ와 손잡고 한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궈냄으로써 민주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미리 써둔 묘비명에서 ‘아흔 살을 살았지만 지난 89년이 헛되다(年九十而知 八十九非)’고 말했다. 그는 ‘정치는 허업’이라는 철학을 간직한 채 타협과 실용의 정치를 추구해왔다. 그래서 그의 92년 정치인생이 분열과 갈등, 독선과 불통으로 점철된 오늘의 정치권에 던지는 숙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첫째, 그는 통합을 주문하고 있다. 20여 년 전 그가 이끌던 자민련 출입 당시 그에게 사석에서 “왜 정치를 하느냐”고 물었다. JP의 답은 이랬다. “미국은 헌법이,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이 국가 통합을 이끈다. 우리나라는 뭐냐. 대통령 1인이 정치·사회를 지배하지 않나. 보수와 진보가 싸우면서도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를 함께 걱정해야 하지 않나. 그러려면 구라파(유럽)처럼 의회가 통합을 이끌고 가야 한다. 그게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다. 내각제를 해야 비로소 통합도 되고 덧셈의 정치도 되는 거다.” JP는 한국의 두 가지 국가적 과업인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후엔 산업화에 매진했고, 1990년 3당합당으로 논란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연대를 통해 김영삼(YS) 집권에 도움을 줬다. 또 1997년 포스코 창업자인 박태준을 영입한 데 이어 DJP 연합으로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냄으로써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통합을 실천했다.
둘째, 그는 협치를 일깨웠다. JP는 공존의 정치가였고, 정치의 본질이 협상에 있다는 걸 잘 아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민감한 정치 이슈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측근들에게 늘 “기다려 보자”고 얘기하곤 했다. 뭔가 결정해야 할 시간에 “단칼에 뭘 다 베려고 하면 다친다”고 말했다.
기다리면서 상대의 표정과 변화를 읽어내고 현안을 조율하는 데 해답이 있다고 그는 믿었다.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는 주체의 다양성을 깨닫고 이들과 공존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JP는 1998년 DJP 공동정부 출범 후 국무총리 재임 중에도 DJ가 이끄는 청와대 수석비서관들과는 물론 야당 인사들과 수시로 식사를 함께하거나 골프 등을 통해 회동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라고 평했다.
여당이 먼저 포용하고 아량을 베풀며 야권을 대화의 장으로 끌고 가야 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오늘날의 정치권에서 실종된 협치의 정신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셋째, 그는 포퓰리즘의 유혹을 경고했다. JP의 정치철학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의 사생관은 ‘인생은 짧은 것. 쩨쩨하게 살지 말자’는 거다. DJP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시절 총리 집무실로 찾아가 그를 면담한 일이 있다.
대통령(DJ)과 이념적 거리가 멀어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시느냐는 질문에 그의 답변은 이랬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되 밖에서 자랑하지 말자는 생각을 늘 지니고 다닌다.” 그는 인기를 의식한 대중 인기 영합적인 행위는 정치를 오염시키고 국가를 병들게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다녔다. ‘정치는 허업’이란 말은 여권이든 야권이든 자기 지지층만 바라보면서 상대방 ‘때려잡기’가 능사라고 여기는 정치풍토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며, 타협과 양보로 현대사의 굴곡을 넘어온 고인이 후배 정치인들에게 남긴 잠언 같은 메시지다.
정치인은 늘 ‘주인-대리인 딜레마’를 어떻게 해소하느냐의 문제와 부닥친다. 즉 민의의 정치와 대의(代議) 정치의 조화 문제다. JP의 삶은 정치권이 자기편 여론만 보고 간다면 이는 민의의 정치라는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촛불에만 의지하는 문재인 정부와 여권, 복당파와 비복당파 간 사생결단식 싸움만 일삼는 한국당, 중도파와 개혁보수파 간에 이전투구로 세월을 허송하는 바른미래당 역시 JP가 던진 과제를 이행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허민 선임기자 minsk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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