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민주주의, 단기적으로 비효율
장기적으로는 항상 위기 극복
‘모든 문제 해결된다’ 자만 빠져
위기 발생해도 안주하고 방치
상황 더 악화시킨뒤 수습 반복
‘민주주의 효율화’는 전부 실패
한계 받아들이고 잘 관리해야
민주주의는 이상한 정치제도다. “민주주의는 우연적인, 부주의한 속성을 지닌 정치 유형으로, 무계획적이고 비조직적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옳은 방향으로 가는 체제”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는 엉망진창인 승리자, 우발적인 챔피언이다.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서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모든 위기의 뛰어난 해결사인 동시에 온갖 위기의 무능한 생산자인 민주주의의 두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저자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덫’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는, 특히 단기적으로는 무능하다. 비효율과 무책임은 민주주의 특유의 한 속성이다. 위기의 와중에도 각자도생에 바탕을 둔 부질없는 토론을 거듭하느라, 회생의 골든타임을 놓치기 일쑤다. 단물이 모두 빠질 때까지 현재의 이권을 누리려는 이른바 ‘표심들’ 때문에 위기의 분명한 원인이자 미래의 발목을 잡는 각종 적폐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자금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문제의 가장 유능한 해결사이기도 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는 궁극적 승리를 가져오는 실패 없는 대책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가 새로운 꿈에 빠졌을 때,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했을 때, 1947년 냉전 체제가 시작되고 유럽이 경제적 붕괴 위기에 놓였을 때, 1962년 쿠바에서 미사일 위기가 벌어졌을 때, 1974년 리처드 닉슨 등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이 범죄 혐의로 탄핵되었을 때,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고 세계가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어야 했을 때,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쳐왔을 때, 민주주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지만 파멸과 파탄의 날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민주주의는 왕정이나 귀족정 등 다른 어떤 정치체제보다 위기 적응력이 뛰어나다. 체제 전체를 흔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전체주의같이 소수의 결정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회복 탄력성을 잃고 무너졌지만 민주주의 국가는 항상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오히려 체제를 굳히는 계기로 삼았다.
저자에 따르면, 문제는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신화의 확인이 아니다. 위기의 최종 해결책, 즉 ‘역사의 천사’처럼 보이는 민주주의가 왜 이렇게 자주 심각한 위기를 반복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의 유능함이 곧 민주주의를 무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은 모든 것이 잘 해결되리라는 진보에 대한 ‘자만’으로 발전하고, 여기에 혹여 심각한 피해가 생길지라도 나한테는 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 더해진다. 또한 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그때 가서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생각에 모두가 안주한다. 문제는 어차피 해결될 것이니까 어떻게 해도 상관없다는 일종의 숙명론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승리란, 장기적으로는 옳을지라도 단기적으로 우발적일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보다는 머나먼 역사만 쳐다보는 무능함을 선택하기도 하며, 역사의 필연성을 믿고 무모한 모험에 도전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주어진 문제는 악화되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결국 손댈 수 없을 정도의 큰 위기를 불러들인다. ‘민주주의의 성공’이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비전과 장차 문제의 빌미가 될지 모르는 것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자만의 덫에 빠져 집단적 무능을 방치하고 기어이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유능함은 결국 문제를 우발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자신감을 얻은 우리는 일상으로 되돌아가 달콤한 꿀을 빨면서 다시 문제를 방치하고, 자만은 또다시 거대한 위기를 불러오고….
이러한 악무한을 빠져나올 길이 있을까. 저자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역으로 민주주의를 효율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들, 즉 존재하는 저항을 간단히 제압하고, 있을 수 있는 실수를 피하면서 민주주의를 더 빨리 실현하려 했던 시도들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단칼에 모든 문제를 해결한 알렉산더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속성상 역사를 앞당기는 일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비극적이다. 민주주의의 길은 어느 한 갈래도 쉬운 길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통해 배우면서 이 불가역적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치명상이 되지 않도록 상처를 잘 관리하면서 말이다. 480쪽, 2만3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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