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등 선택적 근로 시간제로 간신히 작업
“美·中 질주하는데 韓 모래주머니 차고 달리는 꼴”
게임업계도 신작출시 차질 속도경쟁력 상실 우려


“당장 내년 신제품 개발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과 중국 기업은 전력질주하는데 한국 기업은 모래주머니를 두 발에 차고 뛰어야 하는 셈이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된 가운데 신제품을 주기적으로 내놔야 하는 국내 대기업 임원이 토로한 말이다. 제품 출시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글로벌 경쟁업체들은 물량 공세를 펼치는데 한국 기업들은 연구·개발(R&D) 현장에서 ‘시간 싸움’에 밀려 특유의 속도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오는 8월 9일 미국 뉴욕에서 하반기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 9을 공개하는 삼성전자 개발팀은 현재 선택적 근로 시간제에 맞춰 막바지 작업 중이다. 근로시간 배분을 근로자 스스로가 결정하는 재량 근무제가 아직 적용되지 않아 한 달 범위에서 총 근로시간을 정해놓고 출퇴근 및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한 것이다. 스마트폰은 제품 콘셉트와 설계 결정, 부품 개발과 완제품 조립, 검수까지 개발 일정이 1년간 빡빡하게 채워져 있다. 업무량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는 출시 한두 달 전이다. 이 시기 제품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마무리 작업에서 하나라도 삐끗하면 제품 출시를 미뤄야 한다. 삼성전자 측은 고육지책으로 택한 선택적 근로 시간제를 통해 가용 인력을 최대한 투입하고 있다.

내년 초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소비자가전 전시회(CES)’에서 신제품을 공개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 개발팀의 근무 여건도 여유가 없다. 내년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하반기부터 업무 강도를 본격적으로 높여야 하지만 근무 시간 제약에 걸려서다. 2∼3년 중장기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팀의 경우 6개월 이상 신제품 개발 기간을 늘리는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의성과 집중도가 필요한 게임업계도 비슷하다. 지난해 2월 주 52시간 근로제를 먼저 도입한 대형 게임업체 넷마블은 지난해 11월 말부터 5개월 동안 신작을 단 한 건도 내놓지 못했다. 업계는 앞으로 주요 업체들이 예년만큼 신작 게임을 짧은 시간에 쏟아내기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개발력 저하가 현실화되면 한국 기업들이 ‘속도 경쟁’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 변화 속도가 빠른 정보기술(IT) 시장에서는 몇 달 앞서 출시한 기업이 수익을 많이 가져가는 선점 효과가 크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이 세계시장을 이끄는 비결은 기술력 차이가 아니라 속도 경쟁력”이라며 “24시간 인력을 쏟아붓는 중국과 미국 기업을 상대로 시간 제약을 두고 개발한다면 한국 기업의 장점인 빠른 시장 대응은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권도경 기자 kwo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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