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 양평동의 한 카페에서 SBS 예능본부 기자간담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SBS 간판 예능 ‘런닝맨’을 담당하는 공희철 CP는 취재진을 향해 사과의 뜻을 밝혔죠. 지난 5월 방송 분량에서 출연자인 배우 이광수가 게스트로 나온 걸그룹 AOA 혜정에게 막말을 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저 역시 해당 방송을 봤습니다. 상대방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 게임을 하는 도중 이광수는 “너 꽃뱀이구나?”라고 농담을 던졌죠. 모두가 웃고 넘어갈 ‘예능 속 상황’이었습니다. 몇몇 매체에 의해 기사화되기는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으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굳이 한 달이 지난 시점에 다시 그 얘기가 불거졌고 사과를 강요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가끔 보면 대중이, 그리고 언론이 TV 속 캐릭터와 TV 밖 실물을 혼동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예능 프로그램에는 대본이 있습니다. ‘런닝맨’도 예외는 아니죠. 구체적인 대사까지 주어지지 않아도, 특정 상황과 각 출연진이 맡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은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프로그램 속 대화와 상황은 설정일 뿐, 실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여론과 언론은 역정을 내곤 하죠.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이름이 붙거나 출연자와 관객이 얼굴을 마주하는 공개 코미디에 출연하는 이들의 비애는 더 큽니다. 작가의 대본과 PD의 연출에 의해 짜인 코너 속에서 대사를 주고 받는 것인데 ‘비하 발언’ ‘막말 논란’ 등에 휩싸이기 십상이죠.

드라마나 영화는 어떨까요? 살인마를 비롯해 대중의 공분을 자아내는 캐릭터가 가득하죠. 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을 향한 대중의 반응은 어떤가요? 막장 드라마 속 여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난 식당 아주머니가 “그러는 거 아니야”라고 핀잔을 줬다는 에피소드가 있긴 하지만, 통상 역할을 맡은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을 칭찬합니다. 주어진 배역을 아주 잘 소화했다는 평인 거죠.

이광수가 잘했다고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불편함을 느낀 시청자들의 지적은 곱씹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오는 상황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TV 밖 이광수가 한 여성을 향해 “꽃뱀”이라고 칭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TV 속 이광수는 ‘런닝맨’에 출연해 대본에 의한 캐릭터 플레이를 하는 배우일 뿐이니까요.

학창시절, “정도껏 해라”고 자주 말하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불혹에 접어들며 제가 그 선생님의 나이쯤 되니, 세상에서 이보다 더한 명언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벼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realyong@munhwa.com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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