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道, 중세 기사道에서 시작
유럽 문화의 요체로 계승·발전
선비정신, 인격 도야에서 출발
윤리적 인간의 이상적 형태로
서구선 시민정신의 귀감 되고
한국선 ‘구시대 유물’로 치부
고결한 이념·도덕적 가치 등
현대사회 나아갈 길 해답 제시
한 사회의 사상과 정신을 관통하는 부류(部類)가 있다. 서양은 ‘신사’가 그런 존재였고, 동양 특히 조선은 ‘선비’가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 한 사회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신사와 선비는 애초부터 다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역사학자이자 코리아텍 대우교수인 백승종은 ‘신사와 선비’에서 오늘의 동양과 서양을 만드는 데 일조한 선비와 신사를 통해, 두 부류의 같으면서도 다른 연원부터 오늘에 이른 모습까지 풀어낸다.
먼저 신사와 선비의 시작부터 보자. 신사의 전통, 즉 신사도는 기사도에 연원한다. 중세 기사도에서 비롯된 신사도는 근대 시민사회의 미덕으로 승화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사실상 ‘유럽 문화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을 형성했다. 신사도는 특히 공교육을 통해 근대시민의 보편적 가치로 전환되면서 이제까지 서구 사회를 지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신사도 혹은 기사도를 무분별하게 추종할 이유는 없다. 일단 탄생부터 기사도는 그리 유쾌하지 않다. 대개의 영화에서 기사는 명예를 중시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용감한 무사지만, 실제 중세 사회의 기사는 “전쟁에 나가지 않을 때는 평민들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는” 사람들이었고, 온갖 이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기 일쑤인 당대 사회의 가장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기사들의 일탈은 당시 유럽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정도였다.
선비는 어땠을까. ‘신사와 선비’의 저자는 중국 전통, 즉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선비의 연원보다는 조선의 선비가 어떻게 태동, 발전했는지에 좀 더 집중한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은 “선비로 인해 꽃을 피웠던” 나라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아 백성을 평안케 만드는 것이 조선 선비의 제일 사명이었다. 더불어 “인과 예의 가치를 수호하며,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선비였다. 평시 인격 도야를 위해 학문에 매진했고,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 마음을 닦으면서 “윤리적 인간”이 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바로 선비다.
그러나 선비는, 그 시작이 불편한 신사(기사)와는 달리, 그 끝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500년간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져” 있던 조선의 선비들은 “성리학만을 정학으로 믿고 살아 시야가 좁아”졌다. 사상의 자유와 관용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문물 수용을 거부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외시하다가 조선 왕조의 멸망을 앞당긴 존재들이 되었다. 왕조의 쇠락과 함께 선비정신은 명맥조차 잇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 셈이다.
신사와 선비의 연원과 결말을 소상히 설명한 저자의 물음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음에도 “중세 기사도와 신사도는 어떻게 오늘날 시민의 교양으로 계승되었을까?” 잊어진 존재들이지만 계승해야 할 것이 많은 “선비정신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기사와 선비 모두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다. 책임감도 투철했고,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데 마음을 썼다. 또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구하려 했다. 신사(기사)와 선비는 모두 국가의 위기 때 칼을 들고 나섰다. 조선의 선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리에 어긋난 왕명”은 단호히 거부하는 결기를 보였다. 왕과 국가의 잘못된 결정에 반대할 때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기도 했다.
시작이 불편하고 끝이 흐지부지됐다지만 신사와 선비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존재들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구 시민들은 “이상을 실천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하는” 신사들을 여전히 존경한다. 서구의 시민교육이 “과거의 기사나 신사처럼 고상한 기질과 품성을 가진 이를 모범으로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중세 기사도의 이상은 현대에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선비의 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매한 인품과 매서운 절개를 몸소 보여준 우리 사회의 어떤 이들은 선비정신을 오롯이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묻는다. 우리 스스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지녔던 고결한 이념과 도덕적 가치를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서구 사회가 걸어간 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라는 저자의 말은 단지 서구의 신사를 칭송하려는 말이 아니다.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자란 문화유산, 그것의 가치를 새롭게 벼리는 일에서 시작해야 우리만의 빛나는 사상과 정신,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길은 우리만이 갈 수 있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324쪽, 1만7000원.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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