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승 교수는 책 제목인 열두 발자국은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을 줄인 것이라고 했다.  어크로스 제공
정재승 교수는 책 제목인 열두 발자국은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을 줄인 것이라고 했다. 어크로스 제공

- 열두 발자국 / 정재승 지음/어크로스

카이스트 정재승 스타 과학자
의사결정 위한 지혜에서부터
4차 산업혁명의 미래까지
12편 주제대한 과학적 통찰

진화생물학·심리·경제학 망라
한국 사회·교육 비판적 성찰
삶의 기술 곁들인 ‘지식 콘서트’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가 지난 10년간 기업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뇌과학 강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강연 12편을 묶은 것이다. 저자는 예전 강연 녹취록들을 다시 읽고 곱씹어 보며 그때 미처 못 했던 말들을 추가해 새롭게 구성했다고 한다.

정재승 교수라면 자신의 전공인 복잡계 물리학을 뇌에 적용해 의사결정 과정을 탐구하는 물리학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의사결정 신경과학을 바탕으로 정신질환 대뇌 모델링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라는 들어도 알기 어려운 분야를 연구하는 과학자지만,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을 두고 저술과 강연, 방송을 해온 과학계 교양 스타이기도 하다. 2001년에 나온 그의 ‘과학콘서트’는 한국 저자에 의한 교양 과학책 시장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됐었다. 그런 저자가 10년간 강연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을 묶었다니 독자로선 10년의 성과를 한자리에서 읽는다고 할 수 있다. 10년 치 적금 통장을 받은 셈이다.

그가 서문에 밝힌,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사결정, 결정장애, 결핍과 욕망, 놀이, 새로운 결심, 창의성,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등 12개의 강연으로 풀려나온다. 우리들이 궁금해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것들이다.

강연의 구성은 일정한 공통점을 갖는다. 일단 전체적인 틀과 출발은 당연히 뇌과학이다. 결핍, 욕망, 창의성, 새해 결심까지 우리들의 흔한 일상적인 일들이 어떤 뇌 작용의 결과인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음속에 누구나 품어보는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이 대부분 작심삼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뇌 역시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가능한 한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 한다는, 그래서 ‘습관의 뇌’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뇌가 습관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게 디자인돼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즐겁게 추구하도록 디자인돼 있기도 하고,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후회’를 하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뇌과학은 우리 자신을 다르게,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렇게 뇌과학에서 시작하지만 저자는 곧 진화 생물학, 과학사, 인문, 심리 실험, 현장 마케팅 사례와 경제학의 이론, 여기에 세상살이 기술과 한국 사회·한국 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까지, 참으로 쥐락펴락 유연하게 넘나들다 인생 철학, 삶의 기술까지 곁들이며 마무리한다.

모두가 ‘나도 혹시?’라고 의심하는 ‘결정장애’를 보자. 일단 1000억 개의 신경 세포로 이뤄져 있고, 주변의 다른 신경 세포와 복잡한 시냅스를 형성하며 얽혀 있는 무게 1.4㎏인 뇌의 의사결정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들려준다. 1848년, 폭발사고로 머리에 쇠막대가 박혀 대뇌 전두엽 부분이 손상된, 뇌과학 역사에서 유명한 피니어스 게이지라는 환자의 경우를 들어 뇌의 어떤 부분이 의사결정에 관계되는지도 흥미롭게 설명한다.

이어 2000년대 초반의 유명한 실험 결과를 통해 왜 결정장애가 일어나는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더한다. 가게에 6종의 잼과 24종의 잼을 진열했을 때 24종의 잼이 진열된 곳에 사람들이 더 붐볐지만 정작 더 많이 팔린 곳은 6종만 진열한 가게였다는 결과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선택의 종류가 많을수록 결정하기 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사회는 패자부활전이 없어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결정이 더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하고, 신중함이 절대 미덕인 사회에서는 기민한 의사 결정을 할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조언도 한다. 이렇게 결정장애라는 화두를 풀어내다 저자는 결정장애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결정을 하라’는 실용적인 대안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저자 자신의 삶의 철학도 보여준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 어떤 두려움 없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 제목인 ‘열두 발자국’은 ‘인간이라는 경이로운 미지의 숲을 탐구하면서 과학자들이 내디딘 열두 발자국’을 줄인 것이라고 했다. 이 열두 걸음은 저자가 서문에서 던진 ‘뇌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략 이런 답을 준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난 수만 년 동안 세상에 반응하며 살아왔고, 천천히 진화하는 부실한 뇌로 이 복잡한 현대 사회를 버텨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하고 행복하며 늘 깨어 있는 존재로 살기 위해 어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저자는 보편적인 인간의 뇌에 대한 이야기지만 독자들의 내밀한 삶에 맞닿기를, 그 안에서 자신과 우리를 발견하는 경험을 공유하길 바랐다. 책은 실제로 그렇다. 인생과 진로에 대해 고민 많은 대학생 딸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책이다. 머리 굳어진 중년의 직장동료들에게도 슬쩍 던져주고 싶다.400쪽, 1만68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최현미

최현미 논설위원

문화일보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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