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는 수상 이후의 활동이 더 빛나는 보기 드문 작가다. 대개 경력의 정점에서 노벨상을 받고 그 이후엔 필력이 조금씩 꺾이기 마련인데 파무크는 2006년 노벨상 수상 이후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을 여럿 써냈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특유의 문체로 접근해 베스트셀러가 된 ‘순수 박물관’(2008), 2014년 발표해 인생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내 마음의 낯섦’, 그리고 2016년 터키 발간 즉시 40만 부가 팔리며 또 한 번 판매 기록을 경신한 ‘빨강머리 여인’이 그렇다.
책은 노벨문학상 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파무크의 장기가 잘 드러난 장편이다.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서사의 그리스 희곡 ‘오이디푸스 왕’과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를 버무려 1980년대 이후 현대 터키 사회의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로 엮었다.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벗어나지 못한 신화 속 인물이고, 반대로 ‘왕서’의 뤼스템은 아들 쉬흐랍을 죽인다는 기막힌 운명을 피하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어느 쪽이든 부자를 둘러싼 운명은 가혹하기만 하다.
이야기는 작가를 꿈꾸다 건축업자가 된 한 중년 남자 젬의 회고담으로 시작된다. 젬은 고교 시절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아버지 부재’ 속에 성장한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대학 진학을 위해 우물 파는 일을 하러 이스탄불 외곽의 왼괴렌으로 떠난다. 왼괴렌에서 젬은 마흐무트 우스타를 만나 일을 배우고 여러 가지 조언도 듣는다. 우스타는 보잘것없는 노동자지만 아버지가 없는 젬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젬은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지만 관능적 매력을 풍기는 빨강머리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 일을 잊지 못해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하고, 우스타를 우물에 버려둔 채 이스탄불로 도망친다. 자기 자리로 돌아온 젬은 과거를 망각하고 성공하지만 결국 기막힌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쯤 되면 그 진실이 무엇인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오이디푸스와 왕서에 관계된 결말이 예상된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파무크는 좀 더 특별한 반전을 꾀한다. 젬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이야기는 마지막 3부에서 화자가 빨강머리 여인으로 바뀌며 그동안 짐작만 했던 일들의 진실을 하나하나 들춘다.
꼬이고 꼬인 줄거리는 마치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의 낯섦’이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 이스탄불의 도시화 과정을 훑었듯이 이번에도 파무크는 한 남자의 인생 속에서 동·서양의 의식차, 신과 인간, 관습과 삶의 문제를 꼼꼼히 조명한다. 376쪽, 1만4000원.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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