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림에서는 규정된 것, 확정적인 것, 부동의 진리 등은 부인된다.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게 언어화하고, 고유한 경험으로 파악해 보여 주려고 한다. 그렇게 실현된 회화에는 목적성이 전혀 없다. 이데올로기나 연상 작용이나 그 어떤 것도 틈입할 수 없는, 엉뚱함·확장·수축의 비(非)설명적 순수회화가 있을 뿐이다.” 추상 화단의 원로로 ‘원초적 기호와 명상의 세계를 화폭에 담는 작가’로 알려진 오수환(72) 화백이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런 예술관으로 중국의 옛 시인 이백과 소동파의 시도 즐겨 읽는 그의 서양화 ‘적막(寂寞)’ 시리즈만 해도, 평론가들은 이런 식으로 극찬해왔다. “굵은 붓으로 그은 대담한 선들은 동양화인 수묵화를 연상케 하면서, 구체적 형태에 얽매이지 않은 독특한 생명력을 지닌다.” “먹을 찍어 한두 번으로 최소화한 붓놀림을 통해 절제되고 긴장감 넘치는 화면을 창출해낸다.”
오 화백의 “인간 본성과 사물의 시원(始原)은 결국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은 텅 빈 세계와 같다”는 말이 화폭에 추상적 시각 언어로 아름답게 구현된 것은 ‘적막’에 앞서 또 다른 주제 ‘곡신(谷神)’의 연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위성을 최대한 배제한 무위(無爲)와 망아(忘我)·무아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실존철학·현상학·구조주의·기호학 등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사유를 섭렵한 데다가, 서예가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노자·장자 등 동양사상과 한학(漢學)에도 심취해 동서양의 지성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신의 좌표를 두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와선 도교(道敎)와 주역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변화’ 시리즈를 발표해왔다. 뛰는 토끼를 솔개가 순식간에 덮치듯이, 응축된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발산해 그리는 그의 작품이 오랜 숙고(熟考)와 내적 성찰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올해로 추상화 40년째인 오 화백이 이번엔 ‘대화(dialogue)’ 연작 30여 점을 선보인 개인전을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지난 6월 20일 시작해, 오는 15일까지 이어간다. 그 작품들 앞에 서면, 그의 이런 말도 누구에게나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 떠나는 것,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갈 때 지우고 떠나는 것도 중요하다. 내 작업도 끊임없이 그리고 나서 지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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