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서강대 교수, 소설가

말의 실행력은 생각보다 큰데
값어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금수저 흙수저 등 유행어 영향
청소년들 도전의식 수그러들어

개그맨의 멘트에 붙는 이름처럼
부정적 유행어도 실명제했으면


우리의 숨은 참으로 신비하다. 살아 있다는 가장 기초적 증거이기에 귀중하다. 우리가 들이마신 공기는 혈액이 순환하는 과정을 따라 폐와 심장과 뇌 외에도 몸의 여러 기관을 돌아 다시 폐를 통해 입으로 나온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즉, 피 정화의 과정에서 발산되는 것이 호흡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말도 그 유사한 과정을 거쳐서 입 밖으로 나온다. 심장과 폐와 뇌라는, 한 사람의 생명과 인격에 직결된 신체기관들을 돌아 그것은 숨이 되고, 말이 된다. 한숨은 아마도 심장에 오래 머무를 것이다. 반면에 깊은 평화의 숨은 혈액이 도는 모든 곳을 편하게 안심시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다고 그 과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가끔 누가 ‘문학이 무엇인가’ 물으면 그저 호흡이라고 대답하는데, 거두절미하고 문학이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물론 호흡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며 다양한 생명의 형태를 경험하게 하는 복합적인 호흡일 것이다. 호흡이 없으면 생명이 멈추듯, 인류의 호흡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말로 살아 있음을 표현한다. 우리의 호흡과 말은 생명을 투자한 어떤 것이기에, 가끔 멈춰 서서 점검해 본다. 요즈음 나의 호흡, 나의 숨결은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값이 치솟기 마련인데, 말값만은 점점 내려간다는 생각이 든다. 말의 값어치는 말이 얼마나 그 내용에 부합하는지로 매겨진다. 다시 말하면, 말의 신용 가치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말의 값이 떨어지는 것은 아마도 말이 심장과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나올 때일 것이다. 정보시대니 영상시대니 해도 말은 더 넘쳐나고 표현 방식도 다변화돼 있다. 그런데 점점 더 말을 믿기 어렵다. 서로의 말에 신용가치를 주지 않는데도 그저 얘기한다. 내 말도 다른 사람이 도맷값으로 쳐서 건성으로 들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니 진지하게 말할 필요도 없다.

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말은 호흡이기에, 한두 기관 건너뛴다고 해도 한 인격체인 인간의 몸을 돌아 나오는 것이기에, 말에는 실행력이 있게 마련이다. 값어치 제로, 값어치 마이너스의 말도 마찬가지다. 말로 세상을 창조하는 창조주의 능력을 전수하지는 못했다고 해도, 우리는 말과 관련된 오래된 경험을 통해 말은 그 자체로 실행력을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로 많은 빚을 단숨에 갚을 수도 있다고 속담은 말한다. 말에 어떤 능력이 있기에 동물인 호랑이마저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 그래서 어린이 말이라도 귀담아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수다스러운 말은 한 집의 장맛까지 쓰게 만들 수 있다. 말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을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해 왔다는 표시들이다. 못된 생각을 품어도 말로는 자제하는 이유가 다 있다. 그러니 생명의 리듬을 나타내주는 바로미터인 호흡을 잘 고르는 것이 한 나라의 건강함과 어찌 관련이 없겠는가.

말의 실행력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어서 남의 말도 내 몸을 돌다 나오면 그 말의 영향을 받게 된다. 2차 대전 당시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독 한 방의 수감자들이 눈에 띄게 건강이 좋았다고 한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은, 그 방의 수감자들이 식사 때마다 돌아가며 음식이 풍성했던 잔치의 기억을 나누면서 다른 방의 수감자들과 달리 건강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반대의 예도 있다. 대부분의 고문이 교묘하며 또한 무서운 것은 말의 부정적인 실행력을 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고통과 위협의 말을 동원해, 끝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말로 발설하게 하는데, 한번 그것을 인정하고 나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의식도 생긴다고 한다.

많은 유행어가 있다. 얼마 전부터 특히 청년층을 조준한 일련의 부정적인 유행어는 이 관점으로 보면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약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 거의 10여 년 전부터 젊은이들의 사기 저하를 조장하는 일련의 유행어들이 유독 빠르게 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청년기에는 미래의 모든 것이 불분명하지만, 그때를 ‘푸르름의 때’라고 수식하는 것은 이때 생각의 잎사귀들이 만개하고, 가지와 새순을 만들고자 나무 위로 오르는 수액이 넘쳐나며, 지난 시간의 누적보다 미래의 가능성이 양적·질적으로 우월한 기간이기 때문이다. 18세에 잡지 ‘소년’을 창간하면서 최남선은 일본이 유포한 토끼 모양의 한반도 지도 대신, 앞다리를 쳐들고 도약하는 자세의 전통적인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 지도를 창간호에 실었다.

대학의 캠퍼스에는 한국과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유럽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외국 학생들이 기숙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헬 조선’이라는 유행어가 한국 청년들의 기운을 빠지게 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어서 청년기에는 엄살이 많은 편이다. 그런 젊은이에게 당신은 아픈 곳이 많으니 힐링이 필요하다고 주삿바늘을 가져다 대면 건강한 사람도 저절로 침대에 눕고 싶어질 것이다.

숫자가 점점 늘어나다 보면 다 포기하는 세대. 그와 비슷하게 일종의 분노와 비애감을 조장하며 결국에는 다 소용없다는 포기론을 유도하는 금수저, 흙수저 운운하는 유행어들. 입안에서 이 유행어들을 읊조리다 보면 그나마 남은 도전 의식조차 슬그머니 영향을 받아 수그러든다. 그런가보다 동의하게 되면서, 저절로 기운이 빠진다. 다음 세대의 주역인 청년들이 풀 죽은 토끼가 되면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도대체 누가 이런 음험한 유행어를 만들고 유포하나. 개그맨의 유행 멘트에는 이름이 중요한데, 이런 유행어에도 실명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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