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출판인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안 나올까요?”

그의 대답은 간결했죠. “번역을 잘 못 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러면서 그는 예를 들었습니다. “‘승무’의 명문인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에서 ‘하이얀’과 ‘나빌레라’라는 글맛을 영어로 온전히 옮길 수 있을까요?” 단어 하나, 문구 하나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과 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거죠. 그만큼 번역이 가지는 힘은 큽니다.

오랜만에 이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요즘 외국 영화 번역을 두고 논란이 뜨겁기 때문입니다. 이 논란은 지난 4월 개봉돼 112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비롯됐죠. 당시 몇몇 장면의 오역이 도마에 오르며 급기야 해당 영화의 번역을 담당한 박지훈 씨의 작품 번역 참여를 반대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제기됐습니다. 다소 과한 대응이라는 반응이 많았지만, “제대로 알자”는 대중의 지적 욕구가 왕성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죠.

이에 대한 외화 수입사나 배급사의 대응은 어땠을까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제작한 마블엔터테인먼트의 신작인 ‘앤트맨과 와스프’는 지난 4일 개봉되며 번역가 표기를 빼버렸습니다. 25일 개봉을 앞둔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번역가를 확인할 수 없죠.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수입·배급하는 롯데엔터테인먼트는 3년 전 전편을 개봉하며 ‘치킨런’이라는 번역가의 예명을 엔딩크레디트에 포함시켰지만 이번에는 삭제했습니다. 대중이 번역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괜한 논란의 불씨가 생기는 것조차 막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죠.

번역가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박지훈 번역가는 아니다”라는 희한한 입장도 내놨습니다. 논란이 불거진 번역가가 참여한 것은 아니니 그냥 묻지 말고 보라는 걸까요? 이런 대응은 번역가로 오래 활동해 온 박 번역가에 대한 예의도 아니죠.

요즘은 어느 식당엘 가도 원산지 표기가 돼 있습니다. 거리를 달리는 택배 회사 차량에는 이 차를 모는 택배기사의 사진과 연락처도 붙어 있죠. 실명제를 통해 “안심하고 먹어도 되고, 안전하게 배달하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화 번역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논란이 불거진 원인을 찾아 바로잡기보다는 논란에 대한 책임을 물을 대상을 거세하는 상식 밖의 선택을 했죠. 그 배경에는 짧은 기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번역을 마치려는 수입사들의 속내가 숨어 있습니다. 번역가를 밝히는 것 역시 ‘대중의 알 권리’라는 것을 그들만 외면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realyong@munhwa.com
안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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