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 신뢰·사기·지휘체계 외면한
문대통령 기무사 문건 대응방식
적폐청산에 복구 자재 불태운 것
사회 안팎의 안전·안보 보루인
軍·사법부에 대한 신뢰 유지는
대통령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몫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은 없다. 정치가 만들고 분배하는 규칙과 가치의 그물이 워낙 촘촘해 산속에 혼자 사는 ‘자연인’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럼에도 정치의 영향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 군(軍)과 사법부다. 군은 외부 공격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고, 사법부는 내부의 갈등과 분쟁을 조정·해결하는 최종 관문이다. 군과 사법부의 생명은 신뢰이고, 신뢰에 치명적인 독은 정치적 편향성이다. 정권 교체에 따라 군과 사법부의 정치적 성향이 다소 바뀔 수 있지만, 진폭이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사회도 위기를 맞게 된다.
군이 최근 국군기무사령부의 ‘위수·계엄령 문건’ 사건으로 정치적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사안의 성격상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대응 방식은 상황 악화에 일조했다. 청와대는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기무사 문건을 언급한 지 4개월이 지나도록 손을 놓고 있었고, 문 대통령은 뒤늦게 ‘병력동원 계획’이 첨부된 것을 알고 격노해서 해외 순방 중 특별수사팀 구성을 지시했다. 대통령 참모진의 직무유기나 문 대통령의 월권 논란은 일단 접어두자. 군 통수권자인 문 대통령은 개인적 분노를 앞세우기보다 군이 입게 될 타격을 먼저 고려해야 했다. 더구나 사건은 문 정부 이전에 발생했고, 조사 대상자 역시 ‘과거의 군’이다. ‘현재의 군’이 정치적 논란에 휘말려 사기가 저하되거나, 지휘체계가 흔들리거나,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우선, 송 장관에게 은밀하게 진상조사를 지시한 뒤 구체적 혐의가 드러나면 송 장관이 직접 수사를 지시하는 수순을 밟도록 하는 게 정도(正道)다. ‘기무사 문건이 수사대상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송 장관을 신뢰할 수 없다면 장관을 교체한 뒤 신임 국방부 장관이 수사 지시를 하도록 해야 했다. 공식 수사가 시작되면 문 대통령은 대국민담화 등을 통해 이번 사건이 과거의 군, 특히 기무사라는 특정 부대에 의해 주도된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현재의 군에 대한 국민의 변함없는 신뢰를 당부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한번 손보려 했는데 잘 걸렸다’고 생각한 듯 군을 몰아붙였다. 이러다 보니 박근혜 정부나 이전 군 수뇌부, 기무사에 대해 비판적인 군 관계자들조차 냉소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혼란기에 안보관리를 잘해 촛불 혁명에 나름 기여했는데 군이라면 무조건 적폐세력 취급하는 데 분노를 느낀다’ ‘이러다 거북선 납품이나 위화도 회군도 특별수사 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 문제처럼 ‘태산명동 서일필’로 끝난다면 군 통수권자의 위상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사법부는 이미 정치 쓰나미에 침몰하고 있다. 원인 제공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포함한 이전 사법부 수뇌부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대응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자초했다. 김 대법원장은 문 대통령이 49년 만에 비대법관 출신을 대법원장에 임명한 코드인사의 하이라이트다. 김 대법원장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 ‘대법원 재판 거래 의혹’을 조사했던 특별조사단이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지만,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면서 그것을 뒤집었다.
문 대통령의 코드인사로 체제 정비를 먼저 마친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법원 행정처 컴퓨터 파일을 임의제출 형식으로 확보하는 등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직권남용, 공무상 기밀누설, 증거인멸 혐의 적용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혐의가 드러날 경우 현직 대법관 소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사법부가 쑥대밭이 되고 있다. 물론 재판 거래 혐의가 확인되면 전직 대법원장이든 현직 대법관이든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젠 혐의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법부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조정할 최종 관문으로서 권위와 신뢰를 유지하기는 어렵게 됐다.
불완전한 독립과 압축성장 과정에서 쌓인 적폐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걸림돌이 되는 측면이 있다. 구부러지고 기울어진 것을 바로 펴고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새 출발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적폐를 청산한다고 재건에 필요한 자원까지 태워버려선 안 된다. 군과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 유지는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대통령을 포함,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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