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소설가 최인훈

“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수화기 너머에서 특유의 차분한 음성으로 거절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워인터뷰의 취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 설명했지요. 당대의 최고 인물들을 초대해 우리 시대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는 것으로, 독자들이 높게 평가하는 코너라고. 북한 출신 한국 작가로서 분단 시대를 온몸으로 겪어낸 선생님의 말씀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그때가 지난해 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바로 그 전해에 문화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새 작품집을 펴낼 의향이 있다”며 작가로서 의욕을 보이셨습니다. 그랬던 분이 막상 대면 인터뷰는 거절하시니 좀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생님의 음성에 힘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건네받은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으시고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올봄에 선생님의 대장암 투병 소식을 듣고 나서야 작년 그때 이미 병의 전조와 싸우고 계셨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섭섭함이 죄송함으로 바뀌더군요.

선생님의 타계 소식을 전하는 매체들이 빠짐없이 소설 ‘광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 24세이던 1960년에 발표한 작품이 80여 년 작가 생애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가는 떠나도 작품은 남는다는 고색창연한 금언의 생명력을 실감합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에 짓눌린 한 지식인 젊은이의 좌절.’ 소설 ‘광장’의 주제를 이렇게 한 문장에 요약하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인 행위인가요. 그저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 문장에 빠져드는 것만이 명작을 대하는 예의일 것입니다.

주인공 이명준이 경험한 남과 북의 광장에 대한 표현. “한국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 갑니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당 아래 모두가 꼭두각시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 위대한 선구자들이 피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인민이란 그들에게 양 떼에 불과할 뿐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다니는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하.”

이런 대목을 읽으면, 이명준이 살았던 시대의 모순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노회찬 의원의 자살은, 그런 모순의 덫이 내밀하게 숨어 있는 우리 광장의 현재를 돌아보게 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도덕성을 지향했던 진보 정치인, 종북파와 싸우면서도 북쪽과 손을 잡아야 한다던 평화주의자의 좌절.

선생님은 ‘광장’을 처음 발표한 후 2010년까지 10번에 걸쳐 개작을 합니다. 작품의 현재성을 위한 고투라는 것이 평자들의 해석이더군요. 저도 그 고투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한자어를 모두 우리말로 바꾼 개정판을 읽으며, 문장의 새 맛깔을 누렸으니까요. 남과 북에서 모두 고독했던 이명준에게 선생님이 주신 선물, 즉 여성들과의 사랑이 우리말 문장 속에서 더 애틋했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소설집은 1994년 ‘화두’였습니다. 1000여 쪽이 넘는 두 권짜리 소설책을 읽기 위해 밤새 끙끙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소설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으나 시, 수필, 평론, 희곡 등은 물론이고 독후감, 시평, 단상 등 글쓰기 양식을 총망라한 작품이었지요.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비망록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자신이 살아온 현대사의 의미를 천착한 걸작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저는 그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20세기 역사 전체를 스스로의 지성으로 조망해보고자 하는 시도에 절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 세기와 감연히 대결하는 작가의 오연함.

선생님께서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이런 화두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21세기 광장의 모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이며, 문학인들은 그 모습을 어떻게 제대로 그려낼 것인가.

사족: 화두 따위는 남기지 않고 홀홀 떠나고 싶다고 하지 마셔요. 뒤에 남아 있는 자들은 이 모순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어떤 화두라도 들고 깜냥 고민해야 하니까요.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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