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서 모았던 한 권 한 권
갑작스러운 이사로 떠나보내
생매장의 고통…분노·애도…
상실·창조까지‘감정의 기록’
결국‘바벨탑’쌓는 人間운명
책을 읽으면서, 문장 사이로, 아내의 목소리가 꾸준히 들려왔다. “책, 언제 치울 거야.” 물론 아내는 책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읽기 중독자와 스물다섯 해 가까이 살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안 곳곳에 널린 책들까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안방을 서재로 쓰고 싶은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사방 벽에 거실 벽까지…. 결국 바닥까지 책으로 덮인 어수선한 집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나한테도 할 말은 많다. 여러 번 시도했다. 버리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하고, 도서관에 기증도 했다. 하지만 책과 이별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게 어렵다. 영혼이 조각나는 기분이 든다. ‘서재를 떠나보내며’에서 알베르토 망겔이 말하듯, “책은 일종의 다층적 자서전이고, 모든 책은 (중략)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밖으로 내보낼 책들을 고르려고 책장 앞에 앉아 보라. 침묵하던 책들이, 갑자기, 말을 걸어온다. 책을 구입할 때 있었던 일들, 책과 관련해 있었던 사건들, 밑줄 긋고 여백에 적은 온갖 문장들…. 일요일 하루, 세 권밖에 버릴 책을 못 고른 적도 있다.
망겔의 이름은 그 자체로 독서가의 별칭으로 여겨진다. 그는 눈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한테 책을 읽어 주는 소년으로 등장해 우리 호기심을 끌었고, ‘독서의 역사’를 써서 우리 행동에 시간의 깊이를 불어넣었으며, 지금은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일하면서 “발현된 모든 종류의 정의”를 소장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곳으로 ‘도서관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자의 운명엔 반드시 책과 이별하는 순간이 포함돼 있는 법이다. 망겔도 이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망겔은 프랑스 농촌 마을의 널따란 석조 헛간에 서재를 마련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파리, 런던, 밀라노, 타히티, 토론토, 캘거리 등을 떠돌면서 모은 책들을 안식시킨다. 서재를 마련한 이들은 흔히 꿈꾼다. 몽테뉴가 책들로 가득한 치타델레에서 오직 영혼만 돌보았듯, 이제 서재가 생겼으니 “나의 진정하고 온전한 이야기가 서가 어딘가 있어서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는 시간과 행운뿐”이라고.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이 망겔의 서재를 파괴한다. 프랑스 정부와 다툼이 생기면서 망겔은 뉴욕 맨해튼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수밖에 없어진다.
일찍이 발터 베냐민이 아내와 헤어지고 작은 집으로 이사해 상자에 담긴 책 2000권을 하나씩 꺼내며 ‘나의 서재 공개- 수집에 관한 한 강연’이라는 아름다운 회상을 남긴 것처럼, 망겔은 ‘서재를 떠나보내며’에서 70여 개 상자에 3만5000권에 이르는 책들을 포장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책들을 “생매장”하는 고통을, “분노와 애도”를, “상실과 창조”를 차례로 기록한다.
상자를 열어 책을 풀어 손에 드는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순간순간 책은 기억의 촉매가 된다. “책은 갑자기 손안에서 하나의 징표, 기념품, 유품, DNA 한 가닥이 된다. 우리 온몸은 이런 것들로 재구성될 수 있다.” 책들을 서가에 배열하는 것은 얼마나 창조적인가. 상자 속에서 “무질서하게 부활한 책”들에 평소 구상해 왔던 아름다운 질서를 부여하는 동시에, ‘아니야, 이게 더 낫겠어’ 하는 우연한 영감과 “변덕스러운 악덕”에 따라 서가에 배치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반대로 서가에서 책을 내려 상자에 넣는 일은 얼마나 우울한 여정인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머뭇거리는가. 망겔은 책 싸기를 “오래도록 지속되는 작별 인사”라고 부른다. 책의 순례자답게, 이 책에서 망겔은 서재를 떠나보내는 여정을 독서와 겹쳐 쓴다. 하루아침에 벌레가 된 불행을 겪은 그레고르 잠자, 불의에 대한 복수를 상상하는 리어 왕, 서재를 잃었지만 돈키호테로 변신해 정의를 전파하러 나선 알론소 키하노 등이 그와 동반한다.
상자 속에 갇힌 책들, 오랫동안 그와 함께했던 책들의 내용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망겔은 위로를 얻고 서서히 상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꿈을 이뤄줄 완벽한 장소를 건설하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바벨탑일 뿐이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루이스 캐럴이 “작가들은 기존의 어떤 책을 다시 쓸지 말해야 한다”고 했듯, 서재가 파괴된 자리에서 책의 인간은 “다시 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상자에 갇힌 책을 해방시켜 완벽한 서재를 이룩하는 일을 또다시 고민하면서 은밀한 꿈을 꾸어 간다. “나의 끝은 나의 시작이다.” 메리 여왕이 처형을 앞두고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옷감에 수놓았던 문장이다. 책의 인간들한테 좌절은 없다. 240쪽, 1만4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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