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혁명 거두 순교이미지 부각
암살현장 철저히 사실적 묘사
화가 인생도‘비열·위대’논란
한 정치인의 죽음으로 세상이 숙연하다. 그의 죽음이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이고 죽음으로 모든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닐진대 그럼에도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까닭은 아마 국민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와 결이 다르지만 프랑스혁명기 급진적이며 과격한 공화파인 자코뱅당. 그중 가장 강경했던 몽타냐르 즉 산악파의 한 사람으로 정치인이자 의사인 동시에 언론인이기도 했던 장폴 마라(1743∼1793)의 죽음이 떠올랐다. 프랑스가 근대민주주의를 탄생시켰지만 완성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멀고 험해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20여 년간 무질서와 혼란으로, 다시 지금 같은 민주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데 50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가장 엄혹했던 것은 국민의회가 성립되고 입헌군주제를 선택한 후, 프랑스혁명 전쟁이 일어나고 이를 물리치고 공화제를 선포하고 극단주의자들인 자코뱅당이 집권했던 시기다. 이들은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루이 16세(1754∼1793)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처형하고 혁명 반대파는 물론 온건파까지 투옥과 고문, 처형하는 과격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그 중심에 프랑스혁명의 3거두로 불리는 로베스피에르(1758∼1794), 마라, 당통(1759∼1794) 등이 있었다. 물론 이들 중 당통과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의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들이 행했던 방식으로 처형됐고 마라는 암살로 세상을 떠났다.
마라는 집에서 목욕하다 온건파인 지롱드당의 샤를로트 코르데(1768∼1793)의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프랑스의회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거두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마라의 장례식에 사용할 목적으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부탁했다. 자코뱅 당원으로 프랑스혁명기 중추였던 다비드는 화가로서 친구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추모하기 위해 ‘마라의 죽음’을 제작했다. 원래 피부병이 심했던 마라는 액체 음식만 먹고 식초를 탄 탕에 몸을 담그고 집무를 했다. 욕조에 놓인 책상 대용의 상자는 마라의 가난과 청빈을 상징한다. 그리고 왼손에 들고 있는 종이는 코르데가 마라에게 접근하기 위해 들고 온 반대파 명단이다. 그림에는 ‘1793년 7월 13일 동지 마라에게 샤를로트 코르데. 나의 불행은 당시의 호의를 필요로 합니다’라는 글이 쓰여 있다. 병으로 망가진 피부는 깨끗하다. 그의 축 처진 오른팔과 흰색 시트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에서 성모에게 안긴 그리스도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상자의 서명은 마치 묘비명 같다. 암살 현장의 긴장과 순교자적 공포 그리고 고전주의 화파의 명료한 규칙과 질서에 바탕을 두고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이 작품은 마라의 죽음을 혁명을 위한 순교로 승화시켜 선전할 목적으로 많은 복제화가 만들어졌는데 원작은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있고 루브르와 베르사유궁전, 디종미술학교 미술관과 랭스 미술관에 전해진다.
이 작품도 주인처럼 한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하다 1893년 가족들이 다비드의 망명을 받아준 브뤼셀에 기증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이런 인생 행보를 두고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가장 비열한 인물이며, 또한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던 루이 다비드”라고 평가했다. 혁명의 완성이라는 신념을 위해 살았던 정치가 마라와 권력을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 다비드의 삶이 오버랩되면서 사람에 대한 평가의 양면성을 생각해본다.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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