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끝났어, 다들 돌아가도록….” 문재인 대통령의 8·15 광복절 기념사를 읽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문장이 떠오른 것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인용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1951년 전쟁방지, 평화구축, 경제재건이라는 목표 아래 유럽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창설했다”며 “오늘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 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제안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동북아다자평화안보체제로 가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알자스로렌 지역은 마지막 수업의 배경 무대다. 게르만 민족이 살다가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프랑스가 점령했고, 1871년 보불전쟁 결과 프로이센에 넘어갔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잠시 독립공화국을 유지하다 프랑스 영토로, 나치 독일에 합병되고 다시 프랑스로 귀속됐다. 조선과 대한제국, 일본 식민지, 미 군정,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역사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던 이유는 풍부한 석탄과 철광석 매장량에 있었다. 패권을 차지할 무기를 만들려면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하는 땅이었다. 결국 어느 한 나라에 알자스로렌을 넘겨주기 싫었던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는 베네룩스 3국이 공동참여하는 ECSC를 만들었다. 로베르 슈망 프랑스 외교장관이 처음 제안해 슈망 플랜으로 불리는 ‘전략적 자산의 공동관리’의 시작이었다. 유럽연합(EU)의 모태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제안한 슈망 플랜의 동북아판,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에는 낭만적 이상주의 외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청와대 외교안보 라인이 고심해 만들었겠지만, 국제정치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패권국가인 미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지리적으로 역외자인 미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큰 동북아 철도 연결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미 중국에 대한 패권 견제에 들어간 미국을 같은 바구니에 넣은 것도 어색하다. 다자평화안보체제는 공통 위협에 대항하는 구조인데 그 공통 위협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하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목표는 패권의 유지다. 오랜 군사적 동맹인 터키에 미국은 테러단체 지원 혐의로 수감 중인 앤드루 브런슨 목사 석방 거부를 빌미로 무차별적 관세 폭탄을 퍼붓고 있다. 들여다보면 러시아와 지난 4월 방공미사일 S-400 도입에 합의하고 1200메가와트 급 원전 도입 계약까지 체결한 레제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자주외교’에 대한 응징 성격이 다분하다.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터키가 러시아 영향권에 놓일 경우 미국의 패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북한 비핵화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고 동아시아철도공동체 추진 속도만 빨라지는 상황은 미국에는 재앙이나 다를 바 없다. 사자는 성가시고 귀찮은 하이에나를 어느 정도 묵인할 수는 있어도, 하이에나와 표범이 손잡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지위를 위협하는 외부 세력도 놔두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지 않으려면 누가 초원을 지배하는지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jk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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