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욱 스탠퍼드大 교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

북한의 한국홀대, 현재진행형
솔직 대화해야 韓·美 균열 예방
文정부, 對北이상론 탈피해야


여름 휴가 중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저서 ‘빙하는 움직인다’를 다시 읽었다.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가 대화와 협상의 틀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한반도 비핵화, 미·북 관계 정상화, 대북 에너지 지원과 경제 협력, 한반도 평화 체제 협상,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 등에 포괄적인 합의를 했던 2005년 9·19 성명의 수준에도 못 미친 채 지지부진하고 있어 과거의 경험을 반추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6자회담 수석대표로 9·19 공동성명을 끌어낸 저자가 치열한 외교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적한 ‘북한의 한국 홀대론’과 ‘미국의 보스 DNA론’은 현 정체 국면에서 한반도 평화 전략을 가다듬는 데 되새겨야 할 점이다.

“북한은 보통 때는 미국과의 대화에만 매달리다가 앞이 꽉 막히면 한국에 지원 요청을 하곤 했다”는 그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외교 전략만 봐도 그렇다. 문재인 정부를 마중물로 해서 미·북 정상회담을 끌어낸 뒤 미국과의 협상에 치중하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을 취소하자 부랴부랴 문 대통령과 두 번째 회동을 했다. 그러나 9월 평양 정상회담은 날짜조차 확정하지 않는 등 한국을 무시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미국은 북한 문제나 한반도 문제의 중요한 계기에는 한국이 결정적인 카드를 쓸 수 있도록 맡기지 않아 왔다. 미국 외교정책의 밑바탕에는 마지막에 못을 박는 것은 미국 몫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지적 또한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문 정부가 제재 완화나 종전선언을 주장해도 미국은 엄격히 비핵화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보스 DNA’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운명과도 같은 이 구조적 딜레마를 헤쳐나가기 위해선 정치적 욕심에서 벗어나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정권을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 북한이 대화 테이블로 나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배드캅’ 역할이 일정 부분 기여한 점을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문 정부는 ‘굿캅’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독일의 경우 1969년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에 의해 시작된 동방정책이 기민당의 헬무트 콜로 이어져 통일되기까지 20년이 걸렸는데, 콜은 취임 연설에서부터 사민당 정부가 맺은 합의들을 이행하고 추진 중인 협상도 진행시키겠다고 선언하며 실행해 갔다. 전·현 정부가 독일을 본받겠다며 경쟁하듯 베를린 선언(김대중), 드레스덴 선언(박근혜), 신 베를린 선언(문재인)을 연이어 발표했지만 정작 이러한 통합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둘째, 장밋빛 청사진을 쏟아내기보다는 차분하게 대북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문 대통령의 ‘동아시아 철도공동체’만 해도 향후 30년간 남북경협에 따른 경제적 효과가 최소한 17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하지만 현실성을 따진다면 박 전 대통령이 주창한 ‘통일 대박론’과 무엇이 다른가?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의 고삐를 풀지 않고 있는 현시점에서, 미군이 떠난 용산에서 보란 듯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은 마치 뭔가 시위하는 듯한 오해마저 불러일으킨다. 임기 내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문 대통령의 마음이 급하겠지만 그럴수록 장기적인 초석을 놓는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셋째, 외교 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외교관과 군인을 소외시키거나 사기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 문 정부의 정책 과정을 보면 외교부나 국방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오히려 과거 정부 때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게 해 적폐 세력처럼 다루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임 정부의 외교정책까지도 수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외국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북핵·남북문제 모두 국제정치학적 요소가 매우 중요하며, 군사적 억지력 강화 또한 중대한 사안이므로 외교관과 군인들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미 간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종전선언, 대북 제재 등 여러 부분에서 정책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적당히 모른 체하고 넘어가는 것은 동맹의 균열만 가속화할 것이다. 북한 석탄 반입 문제만 해도 미국은 한국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말 문제가 있었다면 솔직히 인정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북정책에 있어 한·미 간 견해차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미국의 ‘보스 DNA’를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좋은 대안을 갖고 겸허하게 미국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 대통령이 평양 방문 때 김정은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기에 앞서 야당, 보수 세력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북 문제를 논의하고 외교관과 군인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 한반도의 상황은 진영논리를 따지거나 장밋빛 이상론에 취할 여유가 없으며 총력전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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