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판사·재판연구원 고통호소
수직적 관계에 문제제기 어려워


무리한 요구와 비상식적 행태로 후배 판사들의 진을 빼고 판사직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일명 ‘벙커’들의 만행이 아직도 법원에서 심심치 않게 자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판사들은 후배 판사들이 함께 일하기를 기피하는 선배 부장판사를, 한 번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골프장 모래구덩이에 빗대 ‘벙커’라고 부른다. 흔히 벙커들의 행태는 △후배 판사들의 극심한 노동 강도를 당연하게 여기는 인식 △자신의 일까지 후배에게 떠미는 비합리적 업무 분장 △후배 판사를 무시하는 폭언을 하거나 젠더(성적) 감수성이 떨어지는 부적절한 언행 △점심·저녁은 물론 여가 생활까지 함께하기를 요구하는 등 사생활 간섭 등으로 요약된다.

한 법원장급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재판연구원 및 배석 판사들이 작성해온 판결문을 수차례 ‘빠꾸’(반려)시키는 벙커로 악명이 높다. 해당 부의 배석판사들과 재판연구원들은 이를 감당하느라 새벽 5시 퇴근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린다고 하소연한다. 판결문을 반려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보니 영문도 모르고 수차례 같은 판결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후배 판사들의 토로가 잇따른다. 이들은 “다 같이 고생하는데 어쩔 수 없다는 생각 하나로 버틴다”고 전했다. 젠더 의식이 뒤떨어지는 부장판사가 많다는 증언도 나온다. 여성 재판연구원을 ‘저 여자’로 호칭하거나 여성 재판연구원과의 식사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며 밥을 같이 못 먹겠다고 하는 식이다. 한 여성 재판연구원은 “이게 ‘펜스룰’(성추행 논란 등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해서 여성들과의 교류를 극단적으로 배제한다는 뜻)인가 싶어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화가 계속되는 배경으로는 부장판사로부터 판결문 작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배우는 소위 ‘도제식 교육’이 지목받는다. 엄격한 수직적 상하 관계에 놓여있는 부장판사와 배석판사·재판연구원이 업무는 물론 생활도 함께하는 가운데 후배가 ‘감히’ 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한 재판연구원은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판사 임용이 못 되는 건 당연하고, 임용됐다 하더라도 인정받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재판 연구원은 “벙커를 한 번 겪으면 ‘판포연’(판사 임용을 포기한 연구원)이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고 전했다.

김수민 기자 human8@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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