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소설가, 서강대 명예교수

다리 저는 딸을 가진 엄마
함께 절며 걸어 장애 나눠

유난히 자신감 넘쳐나던 딸
그 딸은 두려울 게 없었겠다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기쁨은 늘어나고 아픔은 줄어


한 사람의 적성이나 성향을 파악하려는 검사에 인간의 정서적인 능력을 재는 감성지수(EQ)가 포함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이 도입된 것이 1990년대 전후라고 하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정서적인 능력이 사회 적응 능력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 사회적 지능지수와 같이 고려되기도 한다. 인간의 정서적인 능력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지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이 영역의 전문가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만한 지수가 아닐 수 없다. 감정을 수용하고 제어하거나, 반응하고 소통하며 관리하는 여러 능력이 그 테스트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다분히 사회심리학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그런데도 감성지수에 대한 관심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정서적인 능력이 눈에 띄게 후퇴하고 있을 즈음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지만, 언어가 중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제일 겁나는 것은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나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다. 그런데 언어가 소통의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 이후 언어에 대한 내 생각은 변화를 겪었다. 더 나아가, 언어가 꼭 말로만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소통 또한 꼭 언어를 통해서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오지 여행에서 길을 잃어, 언어도 문화도 다른 종족의 사람들과 반나절이나 언어 없는, 눈빛만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물론 각자 자기 말로 감탄도 하고 질문도 했지만 그건 그저 서로 무언가를 공감하고 있다는 표시일 뿐 전언적 기능은 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서로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눈빛이 언어의 지시적 기능을 뛰어넘어 작동했던 것이다. 이 공감이 있었기에 우리 일행은 길을 잃고도 두렵지가 않았다. 또한, 각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불과한 서로의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었다. 공감이 형성되자 우리를 맞아들인 그 집의 가장이 서너 가구가 다였던 고립된 그 마을에서 우리를 탈출시켜줄 것을 확신했다. 결국, 그대로 이뤄져 우리는 아쉽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경험을 뒤로하고 문명 세계로 돌아왔다.

반면, 한 시간을 달변으로 떠들고 나서도 아무런 교감이 없이 피곤한 경우도 적지 않다. SNS 공간에서 가볍게 표현하는 좋다, 싫다는 손가락 표시나 한두 번쯤 별생각 없이 눌러 보는 하트 공감 표시도 그보다는 나을 때가 있다.

공감은 진정한 소통의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 활동의 기반이다. 예술가는 감상자의 공감 능력을 믿고 작품을 만든다. 누군가는 내 작품을 이해하겠지 하는 믿음 없이 쓰고, 그리고, 작곡할 수는 없다. 이 무작정의 믿음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든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작가인 아모스 오즈는 한 강연에서 자신의 문학 특성을 전혀 다른 타자와의 공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즈의 작품은 다른 성인 여성의 내면을 탁월하게 그려낸다. 갈등 관계의 팔레스타인을 마주한 이스라엘의 작가이기에 ‘전혀 다른 타자’와의 공감이라는 말이 각별한 의미로 울렸던 기억이 있다.

공감을 그저 정적인 감정적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소극적인 이해이다. 당장은 아무 일이 없어도 결국 공감은 무언가를 하게 한다. 그것이 공감을 단순한 센티멘털리즘이나 감정의 과잉과 구별되게 하는 것이다. 공감은 타인이 기쁠 때 그의 입장에서 같이 기뻐하는 것이고, 타인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인이 슬플 때 내 슬픔이 생각나서, 감염돼 같이 울어줄 수 있다. 타인에게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건 조금 어렵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그 기쁜 일이 내게 일어났어야 하는데 타인에게 일어났기에, 웃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일그러진 미소로 답한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감정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감정이 메마르거나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것을 잘 구분해준 사람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한,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 운동’의 창시자인 아베 피에르는 인간을 두 범주로 보았다. 하나는 자기충족적인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이웃과 공감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가장 고통받는 이의 고통을 맛보고 타인의 고뇌와 필요에 반응한다는 가치관으로 현재 에마우스 운동은 전 세계 40여 개국에 350개가 넘는 단체가 됐다. 이 세계의 비참에 대한 공감이 에마우스 운동을 추동했다.

내가 잊을 만하면 다시 꺼내 들여다보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있다. 전에 살던 동네에 다리를 절며 걷는 딸을 가진 여성이 있었다. 이사 직후, 나는 출근길에 모녀와 이따금 마주쳤다. 엄마인 그 여성도 딸처럼 한쪽 다리를 절고 있어서, 딸 옆에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이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 없이 혼자 장바구니를 들고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그 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딸과 같이 걷느라, 딸의 안타까운 장애를 함께 나누느라고 그녀는 딸처럼 같은 쪽 다리를 절면서 걸었던 것이다. 얼굴에 유난히 자신감이 넘치던 딸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 엄마가 옆에서 걷고 있는데, 딸에게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예술 작품에 대한 공감도,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도 사건을 만든다.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처럼 죽은 자를 살리지는 못할지라도, 인간의 공감도 누군가를 살리는 능력이 있다.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기쁨은 몇 배가 되고, 스러져가던 인생은 되살아난다. 공감의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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