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돈재 前 국가정보원 1차장

대북 특사 일행이 지난 5일 남북 정상회담 일정(오는 18∼20일)과 의제를 협의하고 돌아왔다. 애초에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정의용 특사의 발표 내용을 보면 실망스럽다. 김정은은 억지와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고, 북측과의 합의 내용은 차후 북핵 문제 해결과 한·미 공조에 큰 장애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특사가 김정은의 대변인 역할을 하려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먼저, 김정은의 얘기를 들어보자. 김정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에 변함이 없다고 했지만, 그간의 태도로 보아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핵을 개발한 김정은이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말하는 건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김정은은 핵과 미사일 실험장 폐쇄를 들먹이며 자기들의 선제 조치에 국제사회의 평가가 인색해 답답하다 한다. 하지만 이 시설들은 낡은 데다 필요한 실험들을 모두 마쳐 이젠 쓸모없는 시설임을 다들 아는데 또 우리를 속이려 한다.

김정은은 동시행동 원칙이 준수되면 적극적 비핵화 조치를 할 의지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이 대북 접촉을 시작한 것은 김정은이 일괄타결 수락 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인데 인제 딴말을 한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임기 내에 미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는 1년 이내에 비핵화하겠다던 문재인 대통령과의 약속을 슬그머니 2년 후퇴시킨 것이다. 김정은이 “종전선언은 한·미 동맹 약화와 주한미군 철수와 상관없는 것 아니냐”면서 종전선언 후 주한미군 철수 요구를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 때부터 해온 기만 술책이다. 지금 대다수 국민은 종전선언이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지위 격하 및 북방한계선(NLL) 무력화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번 남북 합의 사항은 대부분 북측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북핵 공조와 국가 안보에 심한 손상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개소는 유엔 제재 위반이며,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는데도 이번 정상회담 이전에 꼭 개소하겠다고 한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무력충돌 방지 조치들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비무장지대(DMZ) 감시초소 철수 및 지뢰 제거, 서해 NLL 일대 평화수역 설치 등으로 우리 안보에 치명적 손상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정보교환, 훈련참관 등 운용적(operational) 군축으로 신뢰가 구축된 뒤 군사력 감축 등 구조적(structural) 군축을 하는 게 순서인데, 왜 조급하게 거꾸로 추진해 안보태세에 큰 구멍을 내려는지 모르겠다.

또, 이번 대북 특사단의 모습을 보면 과공(過恭)으로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지난 3월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김정은을 박학다식하고 대담하고 배려심 있고 예의 바른 지도자라던 칭송이 대변인 역할로 바뀌었을 뿐이다. 북한과의 접촉 결과를 국민에게 상세히 알리겠다면서 정 특사가 김정은의 말을 그대로 전함으로써 우리 특사가 김정은의 말을 신뢰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 특히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번 평양 남북 정상회담은 북핵 문제 해결과 한·미 동맹의 장래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 같다.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견인하겠다는 문 정부와, 남북관계 발전과 비핵화는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는 미국 정부 간의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김정은에게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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