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알렉시스 크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 1000여 개의 맥주병 위에 청소선이 올라앉아 있다.
제1회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알렉시스 크초의 ‘잊어버리기 위하여’. 1000여 개의 맥주병 위에 청소선이 올라앉아 있다.

개최도시 브랜드 가치 제고 수단
작가 잔치일 뿐 관객 대우는 소홀
작품 설명문 형식적이고 일방적


목하 비엔날레의 계절이다. 농부들은 염천 더위와 가뭄으로 흉년이라 울상인데 비엔날레만 풍년이다. 우선 원조 비엔날레라고 할 제12회 광주비엔날레(9월 7일∼11월 11일)가 막을 올리자 그날을 중심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9월 6일∼11월 18일)’ ‘제9회 부산비엔날레(9월 8일∼11월 11일)’ ‘제7회 대구사진비엔날레(9월 7일∼10월 16일)’ ‘제4회 창원조각비엔날레(9월 4일∼10월 14일)’ ‘제1회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9월 1일∼10월 31일)’가 열렸고, ‘제5회 대전비엔날레(7월 17일∼10월 24일)’ ‘제8회 금강자연비엔날레(8월 28일∼11월 30일)’는 이로부터 한두 달 앞서 개막했으니 올해 총 8개의 비엔날레가 거의 동시에 열린 셈이다.

비엔날레가 2년마다 열리는 미술 행사를 일컫는 말이니 올해 열리는 비엔날레가 이렇다면 내년에 열리거나 열릴 비엔날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강원국제비엔날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경기도자비엔날레,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제주비엔날레, 서울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등 8개가 대기 중이다. 총 16개의 비엔날레가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셈이다. 이렇게 난무하는 비엔날레는 물론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열리는 비엔날레가 300여 개에 이른다. 동시대의 사회적 현상들을 현대미술을 통해 성찰하며 이를 읽고 대안을 제시하고 담론화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한 비엔날레지만 요즘에 와서는 개최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수단으로 본말이 전도됐다. 이렇게 비엔날레 숫자만 놓고 보면 우린 문화 선진국이다. 그러나 실상은 여전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잔치일 뿐 관객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설혹 초대받았다 해도 겉돌기 일쑤다. 사실 외국의 비엔날레에는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작품에 대한 설명, 해석을 덧붙여놓은 명제표가 그것이다. 사실 비엔날레를 찾은 관객들은 당혹스럽다. 관객들에게 설명문은 한 줄기 샘물이다. 그러나 함정은 여기에 있다. 이미 십수 년 동안 수많은 비엔날레가 열려 왔지만 여전히 관객들에게 비엔날레는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왜 그럴까. 바로 현대미술이란 개념의 모호함과 막연함 때문이다.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이기는 하는데 쥐면 바람처럼 빠져나가는 현대미술의 비정형성은 일반 국민이나 시민 그리고 생업에 바쁜 주민들에게는 사치스럽고 허망할 뿐이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현대미술에 익숙해지지 않는 관객들은 예전 학교 다닐 적 시험공부를 한다며 답안지를 보면서 예상문제를 풀었던 것처럼 설명문에 너무 의존해서 작품을 본다. 사실 설명문은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을 읽었다고 해서 작품을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작품 옆에 쓰여 있는 설명문은 작품의 일부지 전체가 아니다. 게다가 설명문의 내용도 급하게 작성한 탓에 거의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것 같은 생경한 말투에다 문법 또한 조악한 수준이다.

이것을 읽으며 작품을 이해했다고 자위하지만 혼란은 크게 가시지 않는다. 사실 설명문이나 도슨트의 설명은 그들의 관점에서 보고 읽은 것일 뿐이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도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입으로 먹어봐야 맛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주입식 감상법에 익숙하다. 읽고 외워야 직성이 풀린다. 마치 요즘 초등학교 체험학습과 같다. 미꾸라지를 만지는 체험을 하면서 매우 미끄러워 잘 빠져나간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체험을 통해 그 미끄러움을 확인하는 식이다. 현대미술이 난해하다지만 우리가 처음 여행 간 도시에서 어리둥절한 것과 마찬가지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알렉시스 크초의 작품만 해도 그렇다. 크초의 프로필이나 작품 제작기법보다는 “아, 어디론가 탈출하려는 난민들을 표현한 것이겠구나” 상상하며 본다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성숙한 관객들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땅에 16개의 비엔날레는 과하다.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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