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해킹 등 7개 종목서 두뇌·체력대결… 장외선 휴강 응원
우리나라 이공계 인재 육성의 산실인 카이스트와 포스텍 학생들이 해마다 9월 학교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고 있다. ‘카이스트-포스텍 학생대제전(일명 사이언스 워)’으로, 국내 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과학기술로 경쟁하는 대회다. 이들 학교는 이때면 모두 휴강하고 16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자존심을 걸고 열띤 대결과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두 학교 유학생들도 대거 동참해 진검 승부에 일희일비하면서 맞수 대결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대회는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대와 매사추세츠공대가 열고 있다.
지난 14일 포스텍 박태준 학술정보관에서 두 학교 학생들이 벽을 사이에 둔 실습실에서 해킹 실력을 겨루고 있었다. 이 대회의 대표적인 과학기술경기로 두 학교 ‘정예 요원’ 각각 12명이 참가했다. 대회는 해킹 대상의 서버를 뚫고 빙고 판의 문제를 푼 뒤 빙고를 만드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학생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무려 12시간 동안 컴퓨터와 싸움을 벌였다. 카이스트 강현우(22·4학년·전산과) 씨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승리해 기쁘다”며 환호했다.
다음 날 오후 야외 특설무대에서 열린 인공지능(AI) 프로그래밍 경기는 상대편 돌을 내 편으로 바꿔서 최종 개수로 승패를 가르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 경기를 위한 AI 프로그램은 두 대학에서 각각 설계했다. 포스텍 관계자는 “학생들이 여름 방학 동안 맹훈련할 정도로 자존심을 걸고 대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 경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게임사 중 하나인 넷마블이 문제 출제와 심판 등 행사 지원을 했다.
두 학교는 대회에서 사활을 걸지만, 이공계 선두 대학으로 서로 교류하면서 친목하고 화합하는 좋은 기회도 얻고 있다. 이재석(22·4학년·물리학과) 카이스트 총학생회장은 “이 대회는 이공계 특성화 대학 간 동질감을 느끼고 과학이라는 종목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즐기는 장”이라고 말했다. 독일 출신으로 카이스트 교환 학생으로 대회에 참가한 리디아 칼그브리아(여·22·컴퓨터과학) 씨는 “학생들의 경기 열정에 연신 놀랐다. 두 대학 교류는 앞으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틀 동안 진행된 올해 대회는 해킹, 과학퀴즈, AI와 같은 과학 경기와 아시안게임 종목이었던 e-스포츠 ‘리그오브레전드’, 야구· 농구· 축구 경기 등 총 7개 종목을 두고 두뇌와 체력 대결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또 배드민턴이 시범 경기로 남녀 혼합 복식 형태로 진행됐다. 행사는 각 학교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됐으며 대회 기간 중 동아리 공연과 응원단 시범 등 다양한 행사도 열렸다.
주관 대학을 뒤에 표기해 ‘카-포 전’ ‘포-카 전’으로도 불리는 이 대회는 2002년 시작됐다. 올해 17회 대회는 포스텍에서 열렸다. 2009년 8회 대회는 조류인플루엔자(AI)로 취소됐지만, 횟수로 17회로 표기하고 있다.
이 대회는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받는 이공계 학문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고,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두 학교가 함께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면에는 지난 1996년 치열하게 펼쳐졌던 두 학교의 ‘해킹 라이벌전’이 시발점이 됐다는 게 포스텍 측의 귀띔이다. 당시 ‘해킹 배틀’을 벌인 카이스트와 포스텍 해킹방지 동아리 회원들이 두 학교 전산시스템을 서로 뚫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두 학교 학생들은 국내 정보기술발전을 위해 손을 잡고 대회를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해킹을 비롯해 과학퀴즈, 적분 미로·창의력 경진 등 과학기술 경기에 스타크래프트(e-스포츠), 운동 종목인 농구, 축구, 야구경기로 치러졌다. 이후 2005년 4회와 2012년 11회 대회에서 AI와 리그오브레전드가 각각 포함되는 등 상황에 맞춰 경기 종목이 바뀌었다. 이 가운데 해킹 경기는 이 대회 종목 가운데 꽃으로 불린다.
올해까지 두 학교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종합 성적은 카이스트가 9승 7패로 앞서고 있다. 종목별로는 카이스트는 해킹과 AI에서, 포스텍은 과학퀴즈에서 나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카이스트는 해킹에서 6년 연속, 포스텍은 과학퀴즈에서 4년 연속 승리하기도 했다. 과학퀴즈는 두 학교 학생 각 6명이 격자 형태의 게임판에 함대와 지뢰를 배치한 뒤 함대와 지뢰 발견에 따라 점수를 얻는 방식으로 치러지며 두뇌 싸움이 치열하다.
10차례 열렸던 스타크래프트 경기는 포스텍이 한 차례 무승부와 함께 5차례 승리해 근소하게 앞섰다. 두 학교에는 자타가 인정하는 스타크래프트 세계 최고수가 많이 포진해 있다.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 게임 역시 7차례 치러졌으며 포스텍이 4차례 승리해 약간 앞서고 있다. 기존 열렸던 적분 미로·창의력 경기 등 기타 과학 분야 경기는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특히 대회 출범 당시 해킹 경기는 문제 출제와 판정의 공정성 때문에 국내 굴지의 통합보안솔루션 업체가 심판을 보기도 했다. 안철수연구소와 와우해커 등이 도움을 줬고 KT 넷에서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전용선까지 제공했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실력이 월등히 향상되면서 두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주관하고 있다.
김동섭(26) 포스텍 총학생회장은 “이 대회는 학생들 사이에서 연간 가장 큰 행사로 자리를 잡았다”며 “두 학교 학생들이 실력을 겨루면서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만남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는 동시에 관계를 형성하는 상징적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두 학교는 국가 이공계 핵심 인력 양성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서 “이 대회는 학생들이 과학기술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명을 되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포항=박천학 기자 kobbl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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