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2박3일 평양 방문은 외견상 남북관계의 한 단계 발전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비롯한 방북단을 예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것은 분명하다. 세계 최악의 폐쇄 체제인 북한으로서는 과거에는 없었던 다양한 생중계, 백두산 관광, 문 대통령에 ‘각하’ 호칭, 청와대 격인 노동당사 회담 등을 통해 정상국가로 가려 한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발신했다.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을 포함해 이런 변화들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런 현란한 이벤트에 한반도 위기의 본질인 북핵(北核) 폐기 문제가 묻혀버린 것은 심각한 본말전도(本末顚倒)다. 이번 평양회담의 성패는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 여부에 달렸고, 첫 단추는 ‘핵(核)리스트 신고 및 검증 확약’이었다. 그런데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회담 후 회견에서 “핵무기도 핵 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자”는 원칙만 얘기했다. 평양선언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조차 미국의 상응 조치라는 전제가 붙었다. 북한은 이미 강선 우라늄 농축(HEU)시설 등을 가동중이어서 영변은 사석(捨石) 카드다.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 영구 폐기 또한 이동식 미사일 발사 차량까지 전력화한 마당에 의미 없는 ‘쇼’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남북 협력에 대한 합의는 넘쳐났다. 특히, 5·24 조치, 미국의 독자 제재, 유엔 제재가 가동되는 상황에서 실행 불가능한 합의가 수두룩했다. 연내 착공을 못 박은 동·서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은 유엔 제재 위반이다. ‘조건 마련’이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정상화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이 만수대창작사를 방문한 것도 유엔 제재 정신 훼손이다. 이런 남북관계의 과속은 비핵화와 심각한 속도 불균형을 이뤄 여러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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