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시대 일본인들은 시신을 대상으로 칼날을 시험하는 시검(試劍·왼쪽 그림)을 했다. 조선 문인들에게 이 같은 풍속은 혐오감을 일으켰지만, 장인을 우대해 조선(造船·오른쪽) 등의 기술이 크게 발달하는 모습은 부러움을 샀다. 창비제공
도요토미 시대 일본인들은 시신을 대상으로 칼날을 시험하는 시검(試劍·왼쪽 그림)을 했다. 조선 문인들에게 이 같은 풍속은 혐오감을 일으켰지만, 장인을 우대해 조선(造船·오른쪽) 등의 기술이 크게 발달하는 모습은 부러움을 샀다. 창비제공

-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 박상휘 지음 / 창비

‘재일교포 3세’ 연구학자
170년간 日 견문기 분석

할복과 시신 대상 칼날시험
주자학적 입장선 혐오 자체

외국기술자들 가업 전승 도와
외래기술 토착화… 호감 대상


다음 주 제주에서 열리는 국제관함식에서 일본 군함이 제국주의 침탈의 상징인 욱일기를 다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의 비판이 거세다. 이번 주,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수상자로 혼조 다스쿠(本庶佑) 교토(京都)대 교수가 선정된 데 대해 국내 언론들은 저들의 탄탄한 기초과학 토대를 다시 부러워했다. 일본인들의 ‘칼’과 ‘기술’에 대해 ‘혐오’와 ‘호감’이라는 한국인들의 양가적인 감정은 에도(江戶)시대에 일본을 견문했던 조선 문인들의 기록부터 나타난다.

도쿄(東京)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조선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중국 중산(中山)대 특빙연구원으로 있는 재일교포 3세 박상휘 박사의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부터 1764년까지 170여 년간의 일본 견문기 35종을 10개의 주제로 분석했다. 기존의 일본 견문기 연구들이 문학적 분석에 치중해왔다면, 이 책은 사절들이 이질감을 느낀 문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접한 구체적 지식 그리고 성찰까지 담아냈다. 조선의 일본에 대한 인식 변화를 추적하고, 조·일 관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양가적 감정 사이를 오가기만 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진다’는 영화 속 대사가 어떤 실마리를 줄 수 있다면, 재일교포 학자의 이 책은 그런 지점을 제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일본 견문기 중에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강황(1567∼1618)이 남긴 ‘간양록’과 1763년 사행에 참여한 원중거(1719∼1790)의 ‘화국지’ 등 두 견문록을 주요하게 다룬다. 강황이 전쟁 상태에 놓인 도요토미(豊臣) 시대를 목격했다면, 원중거는 평화가 정착된 도쿠가와(德川) 시대를 견문했다.

조선 문인들이 가진 혐오와 이질성의 대표적 사례는 ‘칼의 문화’로 상징되는, 무사계급이 지배하는 일본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였다. 주희가 ‘맹자집주’에서 언급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한다’(好生惡死·호생오사)라는 인간의 본성과 달리 일본인들은 ‘죽음을 즐기고 삶을 싫어하는’(樂死惡生·낙사오생) 태도를 가진 것으로 조선 문인들에게 비쳤다. 늘 칼을 차고 다니며 할복과 시신을 대상으로 칼날을 시험하는 시검(試劍) 등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사람의 근본으로 보는 주자학적 생명관에서는 혐오 그 자체였을 터이다.

하지만 왜란 이후 160년의 평화로운 시기를 거친 뒤 일본을 사행한 원중거는 “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에게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쌓여 있기 때문”이며 “이런 이미지는 쓰시마(對馬)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고착된 이미지를 수정해야 한다고 완곡하게 말한다. 그는 “내국(일본 본토) 사람들은 타고난 기가 유약하고 그 풍속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며 ‘호생오사’의 본성을 공유할 단서를 찾고 있다. 또 조선에서 골수에 사무치는 원한의 대상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관해 일본인들 중에도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큰 재앙을 가져온 장본인으로 각인돼 있고, 조선의 복수를 우려하는 일본인도 만나면서 조선 문인들은 종래의 이미지와 다른 측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조선 문인들의 가장 부러움을 산 일본의 풍속은 ‘기술자 우위’의 전통이다. 이를 통해 도자와 칠기 등 일상적인 기술부터 조선(造船), 건축에 이르기까지 정교하고 탄탄하게 발전한 일본의 기술력은 이미 조선이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조선에서 도공 등 당시의 기술자를 데려가는 등 외래기술을 도입하는 처지였던 일본은, 예컨대 외국의 숙련기술자를 국내에 정착시켜 가업을 전승하도록 돕고 기술자 씨족집단을 키워 외래기술을 토착화했다. 강항은 “왜의 풍속은 매사 백공(百工) 가운데 반드시 한 사람을 내세워 천하일(天下一)로 삼고, 그 손을 거치면 아주 조잡하고 미미한 물건일지라고 반드시 금은으로 중하게 보상한다”며 비록 신분이 낮아도 뛰어난 솜씨로 사회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일본의 풍속과 이로 인해 눈부시게 발전한 일본의 기술을 부러워했다. 기술직과 기예를 박대해온 조선의 변화를 주문하는 것이다. 역관 김세희도 기술력이 떨어지는 조선에 대해 “우리 풍속이 지체를 구분해 사람을 구속하기 때문”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현재까지 일본과 우리의 모습에서 여전히 포개지는 이미지다. ‘우월한 유교문명의 전파자’ 조선 대 ‘선진문물의 수용자’인 낙후한 일본이라는 이분법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에 피해의식의 반작용처럼 남아있지만, 조선시대 문인들은 사행록 속에 이미 이를 성찰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유교 문화에서 앞선 조선 문인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시문을 받아 보물처럼 챙겼으며, 이별할 때는 눈물을 흘리고 항구까지 나와 배웅했다. 사행록에 실려 있는 서로 마음을 열어 교류하고 소통하는 경험은 한국과 일본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현재에도 시사를 준다. 444쪽, 2만5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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