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효시 유영국의 고향… 경북 울진
고교때 日人 미술스승덕 입문
日 유학시절 유럽 추상화 심취
귀국후 新사실파로 본격 작업
눈 아닌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
어업으로 富 일군 祖父에 이어
어업·양조장 사업도 겸해 번창
부자화가로 윤택·풍요로운 삶
1970년대 현역작가 중 최고가
산 형태 삼각형 중심 자연묘사
자기의 대표 브랜드 자리매김
“떠나온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도형·곡선·면… 뭐든 다 있어”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화가다. 1930년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유영국은 유럽 모더니즘을 선도한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같은 작가의 기하학적 구성화법을 따랐다. 그 이후 외길로 추상회화를 고집스레 추구했다. 시기별로 화법의 변모가 있지만, 추상작품들을 보면 산 모양의 삼각형을 주축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단순화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검은 선의 굵은 윤곽을 치기도 하고, 기하학적 색면을 엄격히 재구성하기도 했다. 거친 터치를 살리거나, 초록색·붉은색·노란색·보라색·파란색 등의 채색으로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유영국은 산, 바다, 나무, 기와지붕, 해와 달, 황혼 등 고향 울진을 비롯한 한국의 산수를 추상으로 담아냈다.
#동해안의 부촌, 울진 유부잣집에서 태어나
울진은 본디 강원도 땅이었다. 5·16 군사정변 후, 1963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북도로 편입됐다. 신라 법흥왕 때 세운 죽변의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 덕산리 신라고분군 등의 유적이 전한다. 의상대사가 설립했다는 불영사·대흥사·신흥사 등과 9세기 후반의 청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98호), 고려의 배잠사지 당간지주 등 불교유적도 적지 않다. 또 월계서원, 명계서원, 노동서원, 운암서원 등 군에 4곳의 서원이 설립된 것을 보면, 조선 시대부터 교육열이 대단했던 것 같다. 동해안 관동팔경 중 망양정과 월송정을 보유한 명승지로, 조선 시대 문인들에게 유람 지역으로 사랑받았던 고을이다.
조선 후기부터 어업이 주된 경제적 기반이었지만 남쪽으로 부산, 북쪽으로 강릉과 고성, 서쪽으로 안동과 봉화 등을 연결하는 영동 지방 상권의 중심지이자 보부상 집단의 거점이었다. 울진 읍내 시장에는 보부상의 조형물이 설치됐고, 십이령에는 보부상 주막촌을 재현해 놓았다. 1919년 3·1운동의 거점 지역이기도 했다. 현재는 동해안과 더불어 덕구와 백암의 온천지구·불영사 계곡·성류굴·자연휴양림 등 생태문화 관광도시로 발전했고, 죽변에 울진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섰다. 옛 풍요가 지금까지 이어져, 울진에 부잣집이 많다고 한다.
유영국 집안은 강릉 유씨로 중국 한나라를 세운 황제 유방(劉邦)의 성씨다. 1840년대 증조할아버지 유한열이 유명한 사냥꾼으로 원주에서 이주해 터를 잡았고, 할아버지 유재업이 어업과 수산업, 특히 부산 지역과 상거래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키웠다고 한다. 울진 객사 동쪽의 성곽 망루가 있었던 곳을 뜻하는 말루(抹樓) 마을에, 강릉의 고택을 이전해 부잣집의 위세를 갖췄다. 아버지 유문종(1866∼1951)은 독립군자금을 지원하거나 울진제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과 쌍벽으로 일컬어졌다.
유영국은 말루의 대갓집에서 유문종의 4남 4녀 중 여섯 번째,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읍내와 바닷가 사이 솔밭 언덕 아래 대숲이 우거진 고가로, 중부 지역의 전형인 ‘ㅁ’자 평면 구조 기와집이다. 지금도 큰형 유영준의 아들 ‘유상옥 가옥’으로 등록돼 있고, 흰 진돗개와 함께 그 후손들이 산다.
울진공립보통학교(현 울진초교)를 마치고 상경한, 유영국은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를 다니던 중 일본인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에게 감화돼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신미술을 가르치며 자유분방한 교사였던 듯, 그에게 반한 화가 제자가 상당하다. 유영국·장욱진·권옥연·임완규·김창억 등으로, 2·9동인을 결성해 스승을 기렸을 정도다.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원래 마도로스 뱃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진학에 실패하고 1935년 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럽의 추상미술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 아래, 청년 미술인들은 다각형으로 쪼갠 화면의 입체파 큐비즘이나 거친 변형의 야수파 포비즘을 비롯해 표현주의·초현실주의·추상주의 등 유럽에서 불어온 1910∼1920년대 전위적 예술형식에 열광했다. 청년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했던 즉, 이들을 주축으로 ‘자유미술가협회전(自由美術家協會展)’이라는 단체가 창립됐다.
유영국은 1930년대 중반 재학 시절부터 두꺼운 종이나 목판 릴리프로 기하학적 도형을 시도하며 추상(抽象)의 세계를 맛봤다. 1937년에는 김환기, 이중섭 등과 함께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했다. 이듬해 2회전 때 받은 자유미술가협회상이 유영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작가의 길과 화업(畵業)을 추상미술로 고정한 계기였다.
#추상화의 효시로 한국적 모더니즘 길 열어
유학을 마치고 1943년 귀국한 뒤로는 울진에 머물렀다. 그러다 1948년 김환기의 배려로 서울대 응용미술과 교수가 됐고, ‘신사실파(新寫實派)’에 참여하면서부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신사실파는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세 명의 젊은 화가가 결성해, 1948년 첫 전시 이후 세 번의 전람회로 마무리됐다. 해방 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구성된 순수 화가들의 동인이자, 추상미술의 효시인 단체전이었다. 추상적인 선과 점, 그리고 색채로 한국적인 모더니즘(Modernism)을 구축한 이들은 마음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 즉 ‘신사실’이라 표방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과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김환기가 지은 명칭이다.
유영국은 한국전쟁 당시 낙향했을 때도 이중섭, 장욱진 등을 더 포함해 부산에서 1953년에 가진 제3회 신사실파 전시에 동참했다. 1, 2회 때와 달리 3회 출품작들의 제목은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 등이어서 주목된다. 이들은 구상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화면에 산이 등장하기 시작한 점 때문이다. 이 시절부터 산은 유영국 회화의 브랜드가 됐다.
전쟁 기간 울진 죽변에 터를 잡은 유영국은 어업과 양조장 사업을 벌였다. 집안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사업 감각이 좋았던 듯, ‘망향소주’로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이후 죽변항구에 인접한 읍내 번화가에 자리 잡았다. 당시의 죽변양조장 3층 건물은 리모델링돼 현재는 노래방과 주점이 들어서 있다.
1955년에 다시 상경해 김환기를 따라 홍익대 미대 교수를 잠시 지냈다. 서울 북쪽 산세와 한강을 굽어보는 약수동, 우장산 아래 화곡동 등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동시에 서울과 울진을 오가며 사업도 계속했으며, 부자 화가로 소문이 났다. 윤택하고 풍요로웠던 삶이나 건장한 외모를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마인드로 높은 그림 값을 유지시켰던 것 같다. 오로지 국내 굴지의 한 화랑에서만 그림을 유통했고, 1970년대에는 현역 작가 중 그림값이 가장 비싸게 매겨졌을 정도였다.
순수 기하학적 형태의 구성에 산이나 자연의 구상적 이미지를 오버랩한, 유화물감을 두툼하게 바른 유영국의 작업은 한국적 모더니즘의 길을 연 추상화로 평가된다. 초록색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시도한 적색과의 보색대비는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국의 전통 색감이기도 하다.
유영국은 평소 한국적인 것 찾기를 모색하던 미술계 분위기에서 “오래 계속할 수 있는 주제는 산이라 작정하고 그 길에 들어섰지”라고 피력하곤 했다. 1968년 세 번째 개인전 때 어느 일간지의 ‘산만 그리기 20년: 유영국씨’라는 기사에서 “왜 산만을 그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떠난 지 오래된 고향 울진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리고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다채로운 색”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산이 내 안에 있다
울진을 뒤져 유영국의 추상화와 유사한 산세를 찾아 나섰다. 2016년 12월 겨울에 이어 이번 8월 무더위에 다시 울진 땅을 밟았다. 울진 통고산의 불영계곡, 남쪽의 백암산 줄기, 북쪽 응봉산 자락의 덕구온천 지역 등 해발 1000m가량의 높은 산들을 먼저 살폈으나, 바위산 계곡이 깊어 유영국 그림과 유사한 산 모양새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유영국의 추상화 ‘산’ 이미지를 만난 장소는 울진 성류굴 남쪽으로 현종산과 사이, 들과 개울이 어울린 매화면이다. 강릉과 포항을 왕래하던 이곳 매화리 7번 국도에서 전망한 남수산 산세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근남면 소재의 남수산(嵐峀山)은 산 이름대로 푸른 연기(嵐)가 바위 구멍(峀)에서 솟는 산이다. 인근의 성류굴과 함께 석회암지대로, 최근 석회광산의 과도한 채굴로 산의 붕괴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조선 초 풍수학의 대가인 남사고(南師古, 1509∼1571)의 어릴 적 공부터였다고 전해오며,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탐내서 승려를 파견해 쇠말뚝을 박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수산은 정삼각형에 근사한 세 개의 봉우리로 연계돼, 오후 햇살을 등지면 실루엣이 아름답다. 산봉우리는 영락없이 유영국의 추상화, 1984년 작 ‘산’(개인 소장)의 삼각형 구성과 똑 닮았다.
유영국의 산 형상을 작가의 고향 울진에서 만나 반가웠다. 유영국의 예술세계가 어려서부터 늘 보고 살면서 눈에 익은, 내면화된 산을 추상화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어 그랬다. 평생 산을 그리며 유영국은 아예 산을 가슴에 품었던 모양이다. 여주 강천면 걸은리 산 모양 타원형 묘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 화가 유영국”
글·사진=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
서울산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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